고려왕조실록

고려왕조실록 124 - 우왕 3

이찬조 2021. 10. 30. 06:50

고려왕조실록 124 - 우왕 3

- 위화도 회군, 우왕의 죽음

 

그러나 우왕과 최영은 이성계 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요동정벌 구상을 밀고 나갔습니다. 그러나 이때 최영은 이해할 수 없는 결정적 실수를 저지르게 되는데, 이는 총사령관인 자신이 개경에 남은 채 고려의 모든 군사를 요동 정벌 반대의사를 명백히 밝힌 이성계에게 내어 준 것입니다. 설마 쿠데타 까지야 일으키랴 했을까요?

 

아무튼 위화도에 이른 이성계는 예측대로 장마철이 되기도 했지만 북으로 더 이상 진군해 나아가려 하지 않고, 거듭하여 4불가론을 앞세워 회군을 허락해 줄 것을 개경에 요청하였으나 최영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계속 진군할 것만을 명합니다.

 

그러기를 여러 날, 거듭된 회군요청과 거부를 명분삼아, 이성계는 참모 장수들을 모아놓고 “이대로 조정의 명을 따른다는 것은 개만도 못한 죽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제장들은 개죽음을 택할 것인가 나를 믿고 따를 것인가? 이래 죽나 저래 죽나 마찬가지가 아니냐? 나를 따르는 자들은 후에 후한 상을 내리겠다.”

 

하고 부하 장수들을 회유하여 부하들의 전폭적인 지지 하에 전군을 거느리고 마치 개선장군과 같은 기세로 개경으로 회군을 시작하게 됩니다.

 

이즈음 개경에 볼모로 있던 이성계의 가족은 야밤에 소리 없이 이성계군대 쪽으로 달아나 버렸는데, 이를 보면 이성계는 조정의 출병 명령을 따르는 척하면서 사전에 이미 회군을 계획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실상 고려의 전군을 거느리고 입성한 이성계는 가볍게 고려 조정을 접수한 후 최영을 죽여 버리고 모든 실권을 거머쥐게 되었는데, 그런 와중에 우왕은 심복들을 동원하여 이성계를 기습하여 제거하려 해 보았으나 실패하고 곧바로 폐위되어 강화도로 유배되고 맙니다.

 

한편 우왕을 폐한 이성계는 우왕의 아들 창왕을 즉위 시킵니다. 우왕은 강화도로 유배 되었다가 강릉으로 최종 유배지를 옮겼는데, 1389년 이성계를 없애 버리려 했다는 이유로 강릉에서 12월에 죽임을 당하고 맙니다.

 

나중에 기술하겠지만 이때 아들인 창왕 역시 같이 죽음을 당하게 됩니다.

 

우왕에 대해서는 현재까지도 논란이 분분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역성혁명의 주역들이 공양왕 옹립의 당위성을 인정받기 위하여 우왕이 신돈의 아들이라고 왜곡해 놓은 바가 있으며, 고려사마저도 우왕의 시대를 열전 반역전에 편입시켜 놓았습니다. 그러나 선왕의 뜻에 따라 왕위를 물려받은 임금이 반역자라고 기술한다는 것은 천하가 웃을 일이 아니겠습니까?

 

아무튼 역사는 승자의 편에서 기록되기 마련이 당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고려왕조실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려왕조실록 126 - 창왕 2  (0) 2021.10.30
고려왕조실록 125 - 창왕 1  (0) 2021.10.30
고려왕조실록 123 - 우왕 2  (0) 2021.10.30
고려왕조실록 122 - 우왕 1  (0) 2021.10.30
고려왕조실록 121 - 공민왕 5  (0) 2021.1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