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왕조실록(128) 공양왕 2
- 개혁과 역성혁명의 기도
공양왕 재위 3년 동안 신진사대부들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등 사회 전반에 걸쳐 개혁의 바람을 불어 넣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은 고려사회를 다시 건강한 사회로 회복시키기 위한 조치들이 아니고, 급진적 신진사대부들이 꿈꾸는 세상을 앞당기기 위한 조치였을 뿐임을 주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에 반해 정몽주로 대표되는 온건 개혁파 신진사대부들은 고려를 위한 개혁을 꿈꾸고 있었습니다. 최종 목적지는 서로 다르지만 이들은 개혁이라는 화두에 대해서만큼은 공감하고 있었기에 한동안 불안한 동거를 이어가게 됩니다.
이들은 관제를 개편하여, 전리사, 판도사, 예의사, 군부사, 전법사, 전공사를 이조, 호조, 예조, 병조, 형조, 공조의 6조로 개편하였습니다. 또한 유학의 부흥을 꾀하고, 과거에 무과를 신설하였으며, 신진사대부의 본질을 반영하듯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숭상하는 사회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주자가례(중국 남송의 유학자인 주희의 편저로 전해지는 서책으며, 당시 성균관 유교학술원의 연구진에 의해서 번역 주해 된 책으로 우리나라에 수용되어 생활 의례 곧 예속의 준칙이 되어 온 것임)를 시행, 집집마다 가묘(家廟, 조상의 위패를 모셔놓고 제사를 지내기 위해 집안에 설치한 사당)를 세우도록 하였습니다. 또한 사대부들은 불교배척의 일환으로 사찰의 재산을 몰수하여 국고에 환수시켜 버렸습니다.
그러나 토지개혁이라는 미명 아래 자신들의 경제적 기반을 확고하게 다져 이를 통해 역성혁명의 발판을 마련하였습니다. 토지 개혁은 과전법을 통하여 시행되었는데, 과전법은 권문세족의 농장을 모두 몰수하여 국가 재정 확보를 목적으로 하고 있었지만 그렇게 몰수된 토지가 신진 관료들에게 지급됨으로서 경제적 기득권이 옮겨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조준 정도전 등으로 구분되는 급진 개혁파들이 이성계를 옹립하여 역성혁명의 뜻을 내비치기 시작하자, 정몽주를 비롯한 온건개혁파는 이를 막기 위해 노심초사하게 됩니다.
정몽주를 위시한 온건 신진사대부파는 유학의 한계 속에, 왕씨가 아닌 이씨가 왕이 되는 것만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이성계가 보위에 오르는 것을 노골적으로 반대했고, 이성계 세력에 비해 절대적인 전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여 며칠 만에 반 이성계 세력들을 취합해 조정을 장악하고는 이성계를 강하게 견제하기 시작합니다. 바야흐로 역성혁명에 의한 개국이냐, 고려 왕조의 지속이냐를 놓고 두 세력 간에 불꽃 튀는 싸움이 벌어지려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성계라는 걸출한 무인이 버티고 있는 급진 개혁파의 기세를 꺾기에는 온건파 신진사대부들의 세력은 미미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이와 같이 이성계파와 정몽주파의 팽팽한 긴장이 유지되던 와중에 이성계가 사냥 중 말에서 떨어지는 사건이 일어나는데, 정몽주는 이를 하늘이 준 기회로 보고, 정도전, 남은 등을 구속하고 참수 직전까지 몰아가는 등 한 번 빈틈이 보이면 쉴 새 없이 몰아치는 승부사 기질이 다분한 정몽주의 공세에 난공불락이던 이성계의 권력이 무너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들 상황이 되었습니다.
[출처] 고려왕조실록(128) 공양왕 2 .|작성자 kabsoonhw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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