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

영주여행(2014.11.07)

이찬조 2014. 11. 9. 09:37

 

영주여행

 

1. 일시 : 2014.11.7.(금)

2. 행선지 : 서울대-榮州 紹修書院-무섬마을(민속마을지정)-동양대학교 탐방-상경

3. 참석자 : 서울대 행정실장협의회 17명(이종만, 강성호, 손호출, 이찬조, 한길수, 이명순, 이동명, 신형은, 송기형, 황정석, (양은식, 유동선, 이석광, 최충림, 최해영, 민현숙, 유영려), 동양대 이용해.

학교에서 9:45분 출발하여 양재를 거쳐 17명이 출발하여 문막에서 잠시 쉬었다가 영주에 이르니 오후 1시이다. 영주 입구에 이용해 교수님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점시식사를 위해 이용해 교수님이 추천하는 어느 묵밥집을 찾았는데 상당히 괜찮다. 점심식사를 하는데 학교에 인사발령이 났다고 저마다 알려왔다.

나도 핸드폰을 열어보니 김영주 선생님이 일찍 문자를 보내 왔다. ‘해당사항 없음’이라고...얼마후에는 오미영 선생님께서도 문자를 주셨다. 지난 봄 小무의도 여행 시에도 학교에 인사발령이 있었더랬다.

 

점심식사 후 소수서원을 찾았다. 가이드와 함께 설명을 들으면서 한 바퀴 돌았다. 매표소를 지나 소나무 숲길을 50미터정도 지나면 우측에 통일신라 때는 이곳이 절터였다는 증거로는 숙수사지 당간지주가 있었다. 당간지주에 관한 설명 후 두 번째는 경렴정에 관한 설명으로 가장 오래된 누각이란 점을 부각시켜준다. 액판의 글씨는 이황선생의 제자 글씨로 잘 쓴 글씨란 점을...우측의 은행나무는 수명을 다해가는데 은행이 엄청나게 많이 달려있어 학교에서는 열심히 공부를 하여 많은 인재를 배출하라는 뜻에서 은행을.. 절에서는 포교를 위해 은행을 강조하였다는... 곁에 흐르는 시내가 죽계천인데 건너편에는 백운동은 흰색으로 敬자는 붉은 글씨를 선명하게 새겨 두었다. 경자에 숨은 이곳 순흥의 역사의 하나를 알려 준다. 세조3년(1457년)에 ‘금성대군’을 중심으로 단종복위 운동을 추진하였는데 한 시녀의 밀고로 본 운동이 탄로가 나서 이곳 순흥부 주민 중 남자들이 씨를 말리는 역사가 있었는데 그 100년 후 이곳에 한국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을 풍기군수 주세붕 선생님에 의해 건립하였고, 그 이후 이황이 이곳 풍기군수로 부임하면서 그동안의 잃고 폐지되었던 교육의 역사를 다시 이어 가자는 뜻에서 소수서원을 명종께서 직접 써서 하사하였다고 한다.

 

가인드에 기록된 내용을 보면

紹修書院은 풍기군수였던 愼齋(신재) 周世鵬(주세붕) 선생이 고려말의 儒賢인 안향(이곳 순흥안씨)선생의 연고지에다 중종37년(1542) 祠廟(사묘:사당)를 세워 안향선생의 위패를 봉안하고 다음해에는 학사를 건립하여 백운동서원(중국의 백학동서원을 본 따서)을 창건하였다. 명종 5년(1550) 退溪 李滉 선생이 풍기군수로 부임하여서 나라에 건의하여 明宗임금으로부터 紹修書院이란 賜額(사액)을 받게 되어 최초의 사액서원이 되었다. 여기서 한국최초의 사학기관으로 4000여명의 제자를 양성하였다고 한다.

 

한편 이곳에 主享(주향)된 晦軒(그믐회,추녀헌) 안향(1243-1306) 선생은 도첨의 중찬(都僉議 中贊) 등을 거치면서 문교진흥에 진력한 최초의 주자학자이시며, 동방 신유교의 비조(鼻祖)이시다. 서원 경내에는 국보 제111호인 회헌 초상과 보물 5점, 도유형문화재 3점을 비롯한 유물, 전적 등이 소장되어있다.

충효 교육관은 160석 정도의 시청각 교육이 가능하고, 서원의 역사와 기능을 볼 수 있는 사료관이 있다. 인근에는 백운교를 건너면 소수박물관이 있고, 좌측으로 조금 올라가서 죽계교를 건너면 저자거리가 있는데 상인들의 몇분 안보였다. 저자거리에서 우측으로 옥계1교를 건너면 우측에는 소수박물관 좌측에는 한국선비촌이 있다. 조금 더 북쪽으로 올라와 옥계3교를 건너면 한국선비 문화수련원이 있다.

 

영주하면 생각나는 곳은 소백산 비로봉, 부석사, 풍기인삼, 영주사과 정도이다. 이번에 水島里와 풍기 인견직에 대해서 새롭게 돌아볼 계획이었다. 그러나 영주로 향하는 버스에서 동양대학교를 방문하여 보자는 의견이 지배적이어서 수도리와 동양대학교로 바꾸어 추진하기로 하였다.

출입문 입구의 좌측에 묘 같은 작은 언덕은 ‘성생단’으로 제물을 검시하던 곳으로 검시관 9분이 모두 만장일치로 인정을 받아야 제물로 드릴 수가 있었다고 한다. 구약의 출애굽기에 나오는 제상방법을 따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강학당’은 입구 바로 앞을 막아선 건물로 상당히 넓은 공간을 확보하고 있다. 사방이 문으로 되어 잇는 것은 수업을 하다가 볼일을 보러 나올 때 무조건 뒷걸음질하여 밖으로 나올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란다. 당시는 선생님의 그림자도 밟아서는 안 되었고 또한 뒷모습을 보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란다. 그 좌측에 문성공묘가 있다. 지금 현재는 문성공 安珦을 원위로 문정공 안축, 문경공 안보, 문민공 주세붕 등 4위를 매년 5월 첫주에 제례를 올리고 있다고 한다. 제향에서는 “회헌 안향 선생께 감히 고하나이다. 선생께서는 유학의 신봉과 교학진흥의 선구자로 길이 추앙 되었기에 희생과 폐백과 술과 서직을 드리옵고 문정공 안씨(안축), 문경공 안씨(안보), 문민공 주씨(주세붕)를 배향하오니 흠향해 주시옵소서”라고 2014.5.6일에 축원했다고 한다.

 

※ 우리나라에서는 현재 9개 서원에서 퇴계 이황(李滉, 도산서원), 회헌 안향(安珦, 소수서원), 서애 류성룡(柳成龍, 병산서원), 회재 이언적(李彦迪, 옥산서원), 한헌당 김굉필(金宏弼, 도동서원), 하서 김인후(金麟厚, 필암서원), 사계 김장생(金長生, 돈암서원), 일두 정여창(鄭汝昌, 남계서원), 고운 최치원(崔致遠, 무성서원) 등 을 모시고 있다.

 

藏書閣은 지금의 도서관에 해당하며 3000여권의 책을 소장하고 있었다고 한다.

直房齋는 선생님의 연구실이란다. 학구재는 조금 뒤쪽으로 건축되어 있다. 그 이유는 선생님들이 기거하는 집과 유생들의 공간의 차이가 확연하였던 권위와 존경에 대한 설명은 요즘 학생들이 수용할 수 있을까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였다. 과거에 그러한 사상이 잘못되었다고만 보는 우리의 젊은이들을 어쩌란 말인가? 지락재 옆의 담은 원래는 없던 것이라 허물고 건너편 산을 향하여 트인 공간을 만드려고 계획하고 있다고 한다.

담 뒤편에는 사료관, 충효교육관이 있고, 우측 뒷길로 나오니 선비촌으로 연결되어있다. 선비촌을 돌아 나와 선비상 앞에서 단체사진을 찍고 무섬마을로 향한다. 피곤해서 모두 잔다.

 

무도리는 굽이굽이 돌아 흐르는 강줄기에 감싸여 자연의 정취로 가득 채워진 수도리 전통마을은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채 선조들의 숨결이 오늘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곳이다. 고색창연한 마을길을 거니노라면 역사를 거슬러 올라 선조들의 체취와 삶의 모습을 새롭게 느낄 수 있으며, 조지훈이 청년시절 시심을 가꾼 곳이기도 하다. 이곳은 산태극, 수태극의 땅, 선상김씨, 반남박씨 집성촌이水島里(무섬마을)은 영주에서 가장남쪽으로 안동시와 경계에 위치하고 있다. 부석사는 가장 북쪽 끝에 위치하고 있고, 영주시는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

가이드의 설명에 의하면 이곳은 27가구에 교수가 17명이 배출 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전통마을이 7곳인데 이곳이 가장 늦게 전통마을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마을은 적고 아직도 초가지붕이 많이 있어 이를 계승하려면 많은 노력이 필요한데 누가 담당하여야 할지 걱정이 많았다.

까치구멍집이란 초가집에 연기가 나갈 수 있도록 굴뚝역할을 하는 것 인데, 제주 민속 마을인 성읍에서도 사각으로 된 방에 불을 때면 온 연기가 방을 그을렸던 방식과 다를 바가 없는 듯 했다.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난 후 마을을 돌아보는데 집집마다 100% 사람이 살고 있다고 한다. 아직 전망대도 갖추어지지 못하였고, 외나무다리가 유일하게 체험을 할 수 있었고, 모래사장위에 아무도 돌아보지 아니하는 널판 하나가 외롭게 설치되어 있다. 시냇물을 건너는데 정신통일이 되지 않고 약간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이 마을이 만석꾼이 많은데 이곳은 토지가 하나도 없다. 강 건너 편에 소작농들이 농사를 지어 가지고 오는 산출이 그렇게 많았다는 것이다. 전에는 외나무다리가 3곳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지금은 하나뿐이란다. 관광객들을 위하기도하고 외나무다리 축제를 하기도 한단다.

관광객이 그렇게 많이 붐비지는 않았고 이제 나날이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가이드가 있는지 없는지도 쉽게 알아볼 수가 없었는데 총무님의 배려로 가이드를 만나 설명을 듣게 되었다.

마을을 둘러보고 곧장 버스에 올랐다. 이제 동양대학교로 향한다.

동양대학교에 이르니 입학처장님께서 학교에 대한 설명과 홍보 동영상으로 20여분간 설명을 들었다.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던 것보다 많은 성장을 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동양대학교는 이곳에서 철도운전원을 배출할 생각을 한 게 특이하다. 시골에서 서울에 있는 전철과 똑같은 시설을 갖추고 실습을 하여 자격증을 취득하게 한다는 발상이 쉽지 않을법한데...

내가 대학행정과 근무 시에 개교한 동양공과대학이다. 지금은 27개학과의 대학교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학과도 세부적으로 파고들어 보석귀금속학과, 국방전자전기학과, 보건의료행정학과, 철도전기통신학과, 철도운전제어학과, 항공비서학과, 문화재발굴보존학과, 건축소방행정학과, 경찰행정학과 등이 돋보이는 학과들이었다. 특히 문화재발굴보존학과 같은 경우는 지역사회와 잘 맞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학교 홍보가 많이 필요할 것 같았다. 그 당시 대학의 설립자도 만나보았고 현재 총장님도 몇 차례 만나보아서 나는 잘 알고 있다. 지방대학교의 핸디캡은 대학편입학으로 공부좀 하는 학생들이 서울로 빠져 나가고 있어 힘이 든다는 사실이다. 이 대학 설립 당시는 미국의 코넬대를 모델로 하겠다고 했는데 벌써 대학주변이 많이 개발된 것 같다. 코넬대의 경우 산골에 위치하여 공부 말고는 할게 없는 대학이라고 한다. 잘 갖추어진 기숙사와 공무원 사관학교, 철도사관학교, 영어사관학교, 선비사관학교 등의 특화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안내할 때 보니 우리 숙소까지 마련하여 두고 있었는데...

이형수 처장님의 사회로 시작하였는데 알고 보니 예전에 교육부에 많이 출입하였던 분이었다.

오늘이 동양대학교 개교20주년 기념일이란다. 의미 있는 날이기도 하다. 설립자는 지난해 별세 했단다.

 

저녁식사는 풍기읍 소백로 2156(2층)에 위치한 ‘횡재먹거리한우’였는데, 인삼판매장 2층이었다.

인삼 판매장에서 인터뷰한 내용을 보면 이렇게 넓은 인삼매장이 4동이 있는데도 모두가 잘된다고 하니 인삼의 홍보가 정말 잘 되어 있는 것 같다.

2층 식당에는 벌써 많은 분들이 자리하고 있었고, 한방에 16명정도 들어갈 수 있는 방에 18명이 앉으려니 복잡했다. 다른 방도 보니 만원이다. 이집이 이곳에서 맛으로는 최고란다. 식사를 맛있게 하고 나왔다. 모두 만족한 표정이다. 오후 7시가지나 출발하여 이용해 교수님은 단양에 내려드리고(자연대가 단양에 와 있음) 북단양을 거쳐 상경하였다. 오는 길에 각자 소감을 말하며, 본회 발전을 위한 방향 등을 의논하며 올라왔다. 올 때는 죽전, 양재, 사당을 거쳐 학교에 이르기로 했다.  서울에 도착하니 10시가 약간 지났다. 



'국내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속초(20150124)  (0) 2015.01.26
춘천(2014.12.30)  (0) 2015.01.05
제주도여행(20144025-27)  (0) 2014.05.10
임진각을 다녀와서  (0) 2013.11.03
포천과 철원을 둘러보고  (0) 2013.1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