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38)> 연산군일기 4
- 무오사화(戊午士禍)(2) 그리고 불길한 전조
“조(弔)의제문”은 중국의 “항우”가 왕인 “의제”를 때려죽인 것을 비난하는 한편 불쌍한 “의제”를 조문하는 내용으로서, 사림파의 거두 김종직이 쓰고, 그의 제자 김일손이 이를 사초에 실은 것입니다.
그러나 “조(弔)의제문”의 진짜 의미는 따로 있었으니, 이는 세조를 항우에, 단종을 의제에 빗대어, 결국 단종을 죽인 세조를 비난하고 억울하게 죽은 단종을 조문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알게 된 연산은 이들이 세조의 정통성을 정면으로 부인하고 역심을 품은 것으로 간주하고, 거대한 옥사를 일으켜, 이미 죽은 김종직을 부관참시하는 한편, 조의제문을 사초에 적은 김일손 등을 능지처사 하였습니다.
또한 김일손을 격려한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의 목을 베었고, 김종직의 제자로 거론된 많은 선비들을 장 100대씩을 쳐 유배 조치하였는데, 참고로 장 100대를 맞으면 죽거나 불구가 되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무오사화로 많은 선비가 옥사하고 사림파가 쑥대밭이 되었는데, 이러한 무오사화의 승자는 누구였을까요
외형상으로는 국문을 담당한 훈구파 대신들과 유자광이 승자 겸 주연으로 보였으나, 진정한 승자는 따로 있었으니, 이는 사건의 총감독인 바로 연산이었습니다.
정치적 감각이 매우 발달한 연산은 김일손의 사초를 접하자마자 이 사건이 몰고 올 파장의 크기를 즉시 가늠하고, 사건을 김종직 사단 전체로 확대시켜 정국을 혹독하게 몰고 갔고, 이 일을 기화로 연산은 집권 4년 만에 강력한 왕권을 행사할 기틀을 마련한 것입니다.
이로부터 몇 해, 연산은 중급 이상의 정치를 펼치며 태평성대라 할 수도 있을 정도의 정치를 펴는 듯하면서도, 잊을 만하면 폐비 윤씨의 일을 넌지시 던지곤 하여 대신들의 가슴을 뜨끔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연산이 일정 주기로 끊임 없이 폐비 윤씨의 일을 들먹인 모습이나 이후의 잔혹사를 보면, 이 시기에 연산은 만연하게 하루 하루를 보내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속으로 복수의 시나리오를 짜는 한편, 복수를 할 힘을 기르고 그 적당한 때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무오사화가 있고 5년이 흐른 연산 9년 어느 날,
연산이 개최한 궁중 잔치에서 이세좌가 연산으로부터 받은 술을 마시다 술 몇 방울을 연산의 곤룡포에 떨어뜨린 일이 있었는데, 연산이 이런 사소한 해프닝을 이유로 이세좌를 파직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별 일 아닌 것 같은 이 일의 대상자가 다름 아닌 이세좌였다는 것입니다. 이세좌가 누구입니까 이세좌는 바로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들고 간 사람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우발적으로도 볼 수 있는 사태가 사실은 연산의 광기서린 대 복수의 서막이었으니, 이때부터 폐비 윤씨의 일에 관여된 사람은 살아도 산 목숨이 아니었습니다. (아휴 살 떨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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