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52)> 명종 2- 명종의 죽음과 사림의 재등장

이찬조 2021. 4. 6. 23:04

<조선왕조실록(52)>  명종 2
- 명종의 죽음과 사림의 재등장

문정은 명종 8년, 명종 나이 스물에 섭정을 그만두고 명종으로 하여금 만기를 친지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물러났어도 그녀는 여전히 권력의 중심이었고, 그 동생 윤원형의 권세 역시 변함없이 강성하였습니다.

윤원형은 20년동안 권력 실세로 군림하면서 그 끝을 모를 부패행위를 일삼았습니다. 사시사철 전국 각지에서 뇌물을 실은 수레가 올라왔고, 곳곳이 농장이며, 한양에만 대저택이 10여 채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윤원형의 주변 인물 중 최고 화제는 바로 정난정이었습니다. 정난정은 부총관을 지낸 정윤겸과 관비의 사이에서 태어난 서녀로 엄청난 미인은 아니었지만, 남자를 유혹하는 묘한 매력을 가진 여자로, 원형의 마음을 송두리째 빼앗아 그 첩이 되더니, 한 발 더 나아가 기존 정실을 내몰아 죽인 후 스스로 정실이 되었습니다.

난정은 문정왕후의 사랑도 듬뿍 받아 궁궐을 무시로 드나들었고, 원형의 권세를 배경으로 상권을 장악하여 전매, 모리 행위로 많은 부를 축적하였으므로, 당시 원형과 난정 부부의 자녀들과 혼인하고자 하는 자들이 줄을 섰다고 합니다.

이러한 난정도 나름대로의 공도 있었다고 하는데, 이는 적자와 서자의 신분차별을 폐지하고 서자도 벼슬길에 나설 수 있도록 하였고, 불교를 융성하게 하였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하지만 난정 역시 문정왕후와 함께 사대부들의 공공의 적이었으므로, 원형의 권력 즉 문정왕후가 죽자 원형과 함께 유배될 수밖에 없었고, 끝내는 늘 소지하고 다니던 독약을 먹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원형 역시 난정이 죽은 지 5일 만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합니다

문정왕후, 윤원형이 모두 죽은 후, 이들의 자리를 메운 것은 사림이었습니다.
사림은 거듭되는 사화로 많은 유학자를 잃었지만 전국 각지에 은거하며 학문을 닦고 제자를 길렀으며, 문정왕후가 죽자 봇물처럼 정계에 등장하여 윤원형 일파를 제거하는 등 실로 오랜 만에 중앙무대를 장악할 토대를 마련하였습니다.

한편, 명종은 부인 심씨와의 사이에 아들 하나를 두었을 뿐, 후궁으로부터도 아들을 하나도 얻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 뿐인 아들이 열세 살의 나이로 죽고 말았습니다.

이에 후사를 걱정하던 명종은 배다른 형제 덕흥군의 아들 셋을 불러 자신이 쓴 익선관을 벗어 써보라고 하자, 다른 아들들과 달리 셋째인 하성군은 “성상께서 쓰시는 것을 신하된 자가 어찌 쓸 수 있겠나이까”라고 하여 명종의 눈도장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 얍삽한 자가 명종의 뒤를 이은 선조가 됩니다.

명종은 외아들 사망 이후 시름시름 앓다가 재위 22년만인 1567년 죽으니 그의 나이 겨우 34세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