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89)> 인조 7 - 비운의 소현세자(2)

이찬조 2021. 5. 4. 05:45

<조선왕조실록(89)> 인조 7 - 비운의 소현세자(2)

이즈음 심양에서는 청태종이 병으로 죽고 그의 동생 도르곤이 청 태종의 여섯 살 난 아들을 황제로 세운 후 전군을 총 동원해 명나라 정벌에 나섰습니다.

한편, 이때 명나라에서는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나더니 이자성이 급격히 세력을 키워 북경을 접수했습니다(명나라 승정제의 자살과 함께 명 왕조는 종말을 고하게 되었음).

그러나 청나라의 도르곤은 압도적 전력으로 어렵지 않게 북경을 함락하고 명실공히 중원의 지배자가 되었습니다.

북경을 점령한 청나라는 변발을 강요하는 등 한족의 반감을 사기도 했으나, 유연하고 절도 있는 조치로 인심을 얻고, 드디어 북경으로 천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소현세자와 동갑인 도르곤은 소현세자에게 “이제 중원이 하나로 명확하게 통일되었으니 양국이 서로 못믿을 것이 없소. 세자는 그만 본국으로 돌아가시오”라고 하며 세자의 귀국을 허락하였습니다.

1645년 2월 18일, 소현세자 일행은 꿈에도 그리던 고국으로 돌아왔습니다. 백성들은 벽제에서 대궐 앞까지 거리를 메우고 이들을 반겼습니다.

그러나 부왕 인조의 태도는 쌀쌀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반정으로 정권을 잡은데다 거듭된 전란으로 백성들의 지지를 전혀 얻지 못한 인조는 왕권 유지에 항상 불안감이 많았고, 세자가 청국 세력과 백성의 지지를 업고 자기 대신 왕이 될 것이라는 두려움과 의심에 쌓여 있었습니다.

소현세자는 귀국한 지 2개월 남짓 만에 오한이 나 병을 치료 받다가 4일 만에 숨을 거두었습니다.

세자의 공식적인 병명은 학질, 즉 말라리아였습니다.

말라리아는 증세가 심하면 죽음에 이를 수도 있으나,
열대의 말라리아와 달리 온대지역의 말라리아로 어린이나 노약자도 아닌 건장한 젊은이가 급사하는 경우는 매우 드믄 것이었습니다.

소현세자는 병명이 학질로 진단된 후 침을 맞았으나, 병세가 급격히 나빠져 갑자기 사망했습니다. 급작스러운 죽음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돌연사에 가까운 소현세자의 죽음은 큰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식의 죽음을 대하는 인조의 태도는 더 의아했습니다.

대신들은 세자에게 침을 놓은 의원 이형익을 국문하여 처벌해야 한다고 여러 번 간청했으나, 인조는 그런 일은 다반사이므로 굳이 처벌할 필요 없다고 했고,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장례마저 거의 박대에 가까운 수준으로 간소하게 했으며, 그 예법도 세자의 지위에 걸맞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새로이 세자를 정함에 있어서도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소현세자의 아들인 원손이 있음에도 세자의 동생인 봉림대군을 서둘러 세자에 삼았습니다.

위와 같은 제반 정황을 종합해 볼 때 소현세자의 독살설은 대단히 신빙성 있는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자식까지 죽이면서 권력을 유지해야했던 임금, 조선왕중 최악의 왕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