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90)> 효종 현종 1 - 효종 즉위

이찬조 2021. 5. 4. 05:46

<조선왕조실록(90)> 효종 현종 1 - 효종 즉위

소현세자가 죽고 얼마 되지 않아 궁중에서 저주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인조는 소현세자의 부인인 강빈의 궁녀들 몇을 지목하여 죽였고, 강빈의 오라비들을 유배 보냈다가 불러 곤장을 쳐 죽였으며, 급기야 강빈을 폐서인하여 사사시켰습니다.

또한, 그로부터 1년 남짓 후 소현세자의 어린 세 아들을 제주로 유배보냈고, 첫째와 둘째 아들은 현지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참으로 잔혹한 아비이자 시아비이자 할애비입니다.

소현세자! 역사에 가정은 없는 것이겠지만, 만약 소현세자가 왕이 되어 서양의 과학 문물을 보급하고 장려하여 조선을 천지개벽할 정도로 바꾸었다면 어찌되었을 것인가.

쉽지는 않았겠지만, 아주 어쩌면 일본보다 200년 앞서 개화를 하고 중흥을 해 아시아 최강국이 되었을 지도 모를 일입니다.---------------

인조는 왕위에 오른 지 27년만인 1649년 향년 5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임진왜란으로 온 나라가 무너진 지 30여년 만에, 이번에는 여진족 수장에게 삼배구고두의 모욕을 당했고, 백성들에게 씻을 수 없는 고통과 아픔을 주었으며, 장자를 죽였다는 의혹을 받는 임금! 참으로 오욕으로 얼룩진 재위기간이었다 하겠습니다.---------------

1649년 인조가 죽고 봉림대군이 31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으니, 이가 조선 제17대 왕 효종(1649~1659)입니다.

효종은 18세이던 1636년(인조 14)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아우인 인평대군과 함께 강화도로 피난을 갔다가 강화도 함락으로 청의 포로가 되었고, 부친인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 황제에게 삼배구고두의 예를 행하는 치욕을 지켜보아야 했습니다.

그리고는 곧 형인 소현세자, 척화신 등과 함께 볼모가 되어 중국 심양으로 끌려갔으며, 볼모지로 가는 도중에 등에 업혀가던 세 살 난 딸이 병사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소현세자의 죽음 이후 세자의 자리에 오른 효종은 청나라에 씻을 수 없는 모욕을 당한 인조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고, 이에 따라 효종을 설명하는 키워드로 등장하는 것은 바로 ‘북벌’입니다.

지금까지의 정설은 “대군시절부터 반청의식이 투철했던 효종은 즉위하자마자 청을 배척하는 세력인 재야 산림(삼전도 굴욕 이후 벼슬을 거부하고 재야에 묻힌 사림세력)을 대거 기용하고, 존주대의(尊周大義)와 복수설치(復讎雪恥)를 목표로 북벌을 추진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단정적으로 결론을 내리기에는 무엇인가 이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