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91)> 효종 현종 2 - 북벌의 실체(1)

이찬조 2021. 5. 4. 05:47

<조선왕조실록(91)> 효종 현종 2 - 북벌의 실체(1)

전회에서 본 것처럼 효종하면 북벌, 북벌하면 효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효종은 즉위하자마자 북벌을 계획했고, 재야 산림의 거두이자 서인의 영수인 송시열을 불러들여 이들과 합작해 북벌을 추진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는 중원을 정복한 청나라의 힘과 기세가 하늘을 찔러 조선이 청나라를 친다는 것은 어느 모로 보나 말이 되지 않던 시기였습니다.

또한 효종은 격변의 시대에 8년간 이역 땅에서 청나라가 중원을 정복하는 장면을 직접 보는 등 온갖 경험을 했고, 귀국해서는 형과 형수 그리고 조카의 죽음 등 정치의 비정함까지 두루 지켜 본데다, 세자에 책봉된 이후에는 왕위에 오르지 못할 것을 우려해 떨어지는 낙엽도 조심하며 살아온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효종이 즉위하자마자 이미 떠 있는 해라 할 수 있는 청나라를 칠 계획을 세우고 이를 정말로 추진했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수긍이 가지 않습니다.(미치지 않고서야)

더욱이 북벌의 파트너라는 송시열은 효종의 거듭된 출사요구를 거절하다가 말년에야 올라왔고, 재직기간도 겨우 10개월에 불과하였습니다.

실록을 보면, 송시열이 그 기간 동안 효종에 대해 수신제가를 강조하는 진언을 한 것이 다소 나타나고 있을 뿐, 북벌에 관한 어떤 계책이나 사대부 사회를 향한 희생 요구 등 북벌과 관련한 어떤 발언도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또한 군역의 폐해가 극에 달해 백성의 원망이 컸을 뿐만 아니라 이로 인해 북벌을 위한 군사력 강화를 기대하기도 어려운 형편이었습니다.

이러한 군역의 폐해에 대해, 유계라는 사람이 다음과 같은 대책을 제시하였습니다.
- 군역의 폐해를 바로 잡아 백성의 마음을 단단히 하여야 국가의 명맥이 유지될 수 있으므로, 이제라도 성지를 내리시어 위로는 벼슬아치로부터 진사, 유학, 서얼로서 허통된 자까지 60세 이하 아내가 있는 자들은 모두 군역의 의무를 져 모두 베 한 필씩 바치게 하소서.

이러한 상소가 논의에 부쳐졌으나 송시열은 아무런 말이 없었고, 결국 “나라가 유지되는 것은 사대부들의 힘이온데, 하루아침에 서민들과 똑같이 군포를 징수한다면 원망이 크지 않겠나이까”라는 신하들의 의견이 받아들여져 유계의 상소는 실현되지 못하였습니다.

위와 같은 점을 보면, 송시열은 효종과 더불어 북벌을 추진하기는 커녕 북벌과 전혀 무관하거나 무관심한 사람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효종의 지지를 바탕으로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다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도대체 왜 북벌하면 효종과 송시열이고, 효종과 송시열 하면 북벌이라는 등식이 마련될 것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