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110)> 경종 영조 7 - 영조의 콤플렉스
노론의 도움으로 왕좌를 차지했지만 붕당 간의 피비린내 나는 정쟁의 폐해를 온몸으로 겪었던 영조는 왕권을 강화하고 정국을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붕당의 갈등을 완화, 해소해 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결과 나온 것이 바로 탕평책입니다.
영조는 즉위 초기에는 자신의 후원세력인 노론을 완전히 무시할 수없는 관계로 경종 시대에 일어난 옥사에서 피해를 입은 노론들을 등용하고 옥사를 일으킨 소론들을 정계에서 내몰았습니다.
그러나 곧이어 노론과 소론의 영수를 불러들여 화목을 권하고 호응하지 않는 신하들은 축출하였으며, 자신의 확고한 뜻을 보이기 위해 성균관에 탕평비를 세우기도 하였습니다.
영조의 이러한 노력으로 중앙정계에는 노론, 소론, 남인, 소북 등
사색 당파가 고르게 등용되어 정국을 운영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영조의 왕권 자체가 노론의 지지로부터 비롯된 것이었기에 영조로서도 모든 붕당에 공평하게 정국을 운영해 가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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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천신만고 끝에 차지한 왕좌였지만 영조에게 형 경종 은 평생 마음의 짐과도 같았습니다.
더욱이 경종의 죽음에 대한 의혹이 서서히 일어나면서 사태는 점점 심각해졌습니다.
일부에서는 영조가 경종을 독살했을 뿐만 아니라 숙종의 아들이 아니라는 소문까지 퍼졌습니다.
영조의 어머니가 궁녀 출신이 아닌 근본을 알 수없는 무수리 신분인 데다가 그럼에도 그녀가 노론을 후원세력 으로 가지고 있었다는 데서 영조의 아비가 노론의 세력가 중 하나일 것이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한 것입니다. 가뜩이나 어머니의 신분 때문에 출생에 대한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던 영조에게는 참으로 참담한 소문이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1728년 소론 중 과격론자였던 이인좌가 정희량 등 일부 소론 세력 및 남인들과 공모하여 밀풍군 탄(소현세자의 증손)을 추대하고 반란을 아울렀으며 난에 참가한 사람도 20만명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난이 진압된 후 잡혀온 이인좌는 국문하는 영조 앞에서 그를 결코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영조가 숙종의 자식도 아니라고 주장하다가 이틀 만에 참수되었습니다.
이 이인좌의 난은 영조에게 크나큰 상처를 안겼고 이 상처는 평생을 따라다녔으며,
그리고 이것이 결국 훗날 자신의 자식까지 죽이는 비극을 낳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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