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115)> 경종 영조 12 - 사도세자(5)
세자와 영조의 관계가 돌이킬 수 없는 단계까지 와 있음을 보여 주는 사건이 영조 37년(1761) 세자의 관서(關西)행입니다.
세자는 그 해 4월 2일부터 22일까지 관서(평안도) 지방을 여행하고 돌아왔습니다.
그 직후인 5월 초, 서지수, 서명응이 세자를 면대해 아뢰었습니다.
- 저하께서 비록 궐 안에 계시더라도 일종 일정을 중외에서 모르는 경우가 없사온데 하물며 여러 날 동안 길을 떠난 경우이겠나이까.
- 천리에 갔다가 오신 몸이면서도 아직도 지척의 진현(임금을 뵈알함)은 행하지 못하셨고,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말을 타고 달리는 예후이신데 아직도 아프다고 하신다면 사람들이 저하의 뉘우침을 의심할 것입니다.
- 관서행을 종용한 자, 관서행 뒤에 세자를 대신해 임금의 명에 비답한 내시를 회부해 죄를 밝히셔야 합니다.
세자는 관서로 여행을 떠나고서도 병이 났다며 내시로 하여금 임금께 올리는 비답을 대신 쓰게 하기 까지 한 것입니다.
세자는 신하들의 관서행 거론에 “대조(영조)께서 아시도록 하려는 수작이 아니냐”며 불만과 불안의 기색을 드러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영조가 이 일을 알게 된 것은 몇 달이 지난 그 해 9월이었습니다. 그러나 상황을 파악한 영조는 뜻밖에도 승지들과 관원들을 벌주는 선에서 이 일을 조용히 덮었습니다. 더 이상 실망할 것도 없다는 느낌입니다.
조선 왕실의 가장 비참한 사건 중 하나인 임오화변은 1762년(영조 38년) 5월 13일에 일어났습니다.
이 날 실록의 기록에는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 세자의 천품과 자질이 탁월해 임금이 매우 사랑했는데, 10여 세 뒤부터 점차 학문에 태만하게 되었고, 대리청정한 뒤부터 질병이 생겨 천성(天性)을 잃었다.
임오화변의 직접적인 계기는 비극 20여 일 전에 제기된 나경언의 고변이었습니다(5월 22일). 이 사건은 나경언이라는 사람이 세자의 비리를 영조에게 고변했다가 무고 혐의로 참형에 처해진 것입니다.
세자가 이 소식을 듣고 달려와 대죄하자, 영조는 세조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습니다.
- 네가 왕손의 어미를 때려죽이고 여승을 궁으로 들였으며 북성으로 나가 유람했는데 이것이 세자가 행할 일이냐?
- 왕손의 어미가 죽은 것은 네 행실을 지적했기 때문이 아니냐.
영조는 나경언의 고변으로 세자의 여러 비리를 더욱 상세히 알게 되었습니다.
실록에는 이틀 뒤 영조가 시전 상인들을 불러 세자가 진 빚을 갚아주었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는 세자가 유희에 내사를 모두 탕진해 시전에서 많은 돈을 빌려 썼고, 이를 갚지 않아 시전의 원망이 컸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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