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113)> 경종 영조 10 - 사도세자(3)
영조와 세자의 사이는 세자가 대리청정으로 정무에 직접 관여하면서 더욱 멀어졌습니다.
전근대 왕정에서 대리청정은 기회이자 위기였습니다. 국왕을 대신해 정무를 잘 처리할 경우는 능력을 인정받고 입지를 다질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하면 신뢰를 잃고 도태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영조는 신하들의 형식적 반대 의례를 거친 후 재위 25년에 대리청정을 시작했습니다. 영조는 정무와 거리가 있는 세자의 기질을 사전의 훈련으로 조정하려는 의도였을 것입니다.
영조는 대리청정을 하면서 세자에게 기본적인 지침을 하달했습니다.
- 여러 신하들이 일을 아뢴다고 하여 ‘그렇게 하라(依爲之)’고 하면 반드시 잘못을 저지를 우려가 있다. 의심스러운 점이 있으면 반드시 대신에게 묻고 자신의 의견을 참작한 뒤에 결정하라.
그러나 그 뒤의 과정은 순조롭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정무적 능력과 수신(修身)에 더욱 불만을 갖게 되었고, 그런 불만은 양위 파동을 계기로 집약되어 폭발했습니다.
기본적으로 양위 파동은 대단히 소모적인 행위였습니다. 국왕이 실제로 그럴 의사가 전혀 없음을 뻔히 알면서도 세자와 신하들은 혼신의 힘을 다해 양위를 만류해야 했고, 국왕은 의사를 관철하겠다고 고집하는 것입니다.
이런 실랑이를 몇 차례씩 거친 뒤에야 어명은 마지못해 거둬지는데, 그 과정에서 충성은 검증되고 불충은 적발되며, 왕권은 공고해지고 이런저런 정치적 전환이 이뤄집니다. 영조도 선왕들처럼 신하들을 제압하거나 정국을 전환하는 방법의 하나로 양위 파동을 사용했습니다.
영조는 대리청정을 시작하기 전까지 이미 5회의 양위 의사를 밝혔고, 그 때 세자의 나이는 각 4, 5, 9, 10, 14세였습니다. 10살도 되지 않은 세자에게 양위하겠다는 영조의 지시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어린 세자는 양위 파동 때마다 긴장하고 두려워하면서 철회를 애원했습니다. 대리청정이 시작된 뒤에도 세 번의 양위 파동이 나타났습니다.
대리청정이 시작된 3년 뒤 어느 날 영조는 양위하겠다는 의사를 밝혔고, 세자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극력 만류했습니다. 그러자 영조는 “내가 시를 읽을 것이로되 네가 눈물을 흘리면 효성이 있는 것으로 보고 전교를 거두겠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시는 시경 소아의 한 편인 ‘육아시(蓼莪詩)’인데, 그 내용은 “부모가 자신을 낳고 기르는 데 수고하면서 큰 인물이 될 것을 기대했지만 그렇게 되지 못해 부모에게 죄스럽다”라는 것이었습니다.
다행히 세자는 그 시의 끝부분에 이르자 부왕 앞에 엎드려 눈물을 줄줄 흘렸고, 영조는 양위 전교를 거두었습니다.
국왕인 아버지의 욕심과 기대가 과도하게 높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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