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132)> 순조 3 - 홍경래의 난

이찬조 2021. 5. 17. 21:24

<조선왕조실록(132)> 순조 3 - 홍경래의 난

1811년 12월 한양에서 멀리 떨어진 평안도 가산에서 일군의 무리들에 의해 저항의 기치가 올려졌습니다. 그 중심에 평서대원수라 불리던 나이 마흔의 홍경래가 있었습니다.

홍경래는 일찍이 평양 향시에 합격한 뒤 한양으로 올라와 대과에 응시했다가 낙방했습니다.
- 내 그럴줄 알았다. 합격자는 죄다 한양 권세가의 자제들. 썩어빠진 세상이다.

홍경래는 각지를 돌아다니며 벗을 사귀고 뜻 맞는 이를 구했는데, 제일 먼저 가산 땅에서 서자 출신의 인텔리인 우군칙과 의기투합했습니다.

이어 대부호인 이희저를 끌어들이고, 인근의 부자, 지식인 장사들을 규합해 무기를 마련하고 가산의 다복동에 지휘부를 차려 은밀히 준비하더니, 이윽고 일어났습니다.
- 3년째 흉작인데다 역병까지 겹쳐 유랑자가 산천에 가득하고 세상에 대한 원망히 하늘에 닿아있다.

이들이 광산 노동자를 구한다는 광고를 내니 굶주린 많은 유랑민들이 찾아 왔고, 그렇게 모인 이들이 초기 봉기의 주력이 되었습니다.

1811년(순조 11년) 12월 18일, 봉기군은 홍경래를 대원수로 삼고 평안도에 대한 차별과 안동 김씨, 반남 박씨 등 척족들의 득세를 규탄하면서 기치를 올렸습니다.

봉기군은 남북 진영으로 나누어 행동을 개시하였는데, 봉기 초반 봉기군의 기세는 거칠 것이 없었습니다. 일부가 한양으로 진격하면서 가산과 곽산 관아를 접수하였고, 관아의 창고를 열어 저장된 곡식으로 빈민들을 구휼하고 무기 등을 빼앗아 전투력을 강화하였습니다.

그 이후 정주, 선천, 태천, 철산, 용천, 박천 등지를 접수하였으나, 박천의 송림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승승장구를 거듭하던 봉기군은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감지한 조정에서 대규모의 관군을 파견하였고, 여기 저기에서 패한 봉기군은 마침내 정주성으로 집결하게 되었습니다.

정주성에 집결한 홍경래의 봉기군은 이후 3개월 동안 처절하고도 거칠게 저항했지만, 역량을 총집결시킨 정규 관군을 끝내 이겨낼 수는 없었습니다. 결국 정주성은 함락되었고 홍경래는 전사하였으며 악에 받친 관군은 닥치는대로 봉기군을 학살하였습니다.

학살을 면하고 체포된 약 2,938명의 군민 중 여자와 10세 이하의 어린아이를 뺀 1,917명의 목이 그 자리에서 잘렸습니다.

홍경래의 난, 비록 궁극적으로는 실패할 수밖에 없는 봉기였지만, 19세기 대격변의 바람이 조선 안에서도 불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는 사건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