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133)> 순조4 - 세도정치의 시작

이찬조 2021. 5. 17. 21:25

<조선왕조실록(133)> 순조4 - 세도정치의 시작

세도정치는 특정가문이 권력을 장악하고 정치를 좌지우지했던 순조 이후의 정치형태로서, 특정 가문의 위세가 당파보다 우위에 서게 되었다는 점에서 그 이전의 당파정치와는 구별됩니다.

또한 세도정치의 주체는 왕가와 혼인관계로 이어진 척신 가문으로서, 이런 점에서 세도정치의 조짐은 영조시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러나 영,정조 때 홍봉한, 김귀주, 홍국영 등의 척신이 권력을 잡기는 했으나, 이 때의 척신들은 영조나 정조의 카리스마에 눌렸다는 점과 순조 이후의 세도정치에는 벽파니 시파니 하는 당파적 색채가 소멸되었다는 점에서 그 성격이 다르다 하겠습니다.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이 끝나고 순조가 친정을 시작하면서 집권한 노론 시파는 벽파를 사실상 궤멸시켜버렸는데, 이러한 시파의 중심에는 안동김씨, 그 중에서도 순조의 장인인 김조순이 있었습니다.

안동김씨뿐만 아니라 온 조정이 그를 주시했고, 권력을 눈앞에 둔 김조순은 깊이 생각했습니다.
- 임금으로부터 그토록 총애를 받았던 홍봉한(사도세자의 장인)이나 김귀주(정순왕후의 동생) 가문이 왜 몰락하고 말았는가
- 모든 것을 독식하려 했기 때문이다.

왕의 국구 김조순은 실제로 순조 재위 기간 내내 대제학, 병판, 이판 등 순조가 내리는 벼슬을 모두 사양했고, 원자의 유선과 요속을 추천해 올리라는 어명에도 다음과 같은 이유를 달아 바로 차자를 올렸습니다.
-신은 조정의 혹과 같은 존재로 은택이 과분하여 위아래에 미치지 못하옵고 좌우에 떳떳함이 없나이다. 추천에 참여하라는 명을 거두어 주소서.

김조순은 이후에도 어떤 관직도 맡은 바 없었으나 이가 30년동안 최강의 막후 실력자였음은 이론이 없습니다.

순조 32년에 그가 죽자 순조는 다음과 같이 그 죽음을 애통해 했습니다.
-그는 부지런하고 충성스러우며 한결같은 마음으로 왕실을 위해 안으로는 지극히 정성을 다해 나를 올바르게 돕고 밖으로는 두루 다스려 진정시켜 시국의 어려움을 구했으니 나라의 오늘이 있도록 보호한 것이 누구의 힘이었는가.

죽은 그날로 순조는 그에게 영의정을 증직했고 문신으로는 최고의 영예인 충문공이라는 시호를 내려주었습니다.

살아서나 죽어서나 이렇게 대접받은 신하는 조선에 없었으니, 이는 앞서 본대로 그의 남다른 처신이 가져온 결과입니다.

이와 같이 김조순이 안동김씨의 일원으로 세도정치를 편 원조이기는 하나, 세도정치의 폐해가 적나라하게 나타나기 시작한 때는 김조순 사후부터입니다.

김조순이 죽자 그 아들, 조카들이 전면에 나서며 세도정치는 막장으로 치닫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