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134)> 순조 5 - 외세의 해일

이찬조 2021. 5. 17. 21:26

<조선왕조실록(134)> 순조 5 - 외세의 해일

벽파의 득세와 시파의 축출, 다시 그 반대의 상황 등 모든 과정을 지켜 본 순조는 청년기를 지나면서 어린 시절 총기와 큰 뜻을 잃고 맙니다.

순조는 더는 그 혼탁한 정치의 세계로 들어가려하지 않았는데, 영조나 정조처럼 당파의 힘을 키웠다 죽였다 하면서 정국을 조절할 탕평의 길을 갈 자신이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순조는 중요한 정치적 판단, 결정을 비변사에 모두 맡기고 정치 중심에서 한 발 뺀 채 민생이나 과거제도 개혁 등에 관심을 기울였으나, 조정을 틀어쥐지 못한 채 벌이는 일들이 제대로 될 리가 만무했습니다.

순조는 체격이 크고 건장했지만 즉위 10년 즈음부터 자주 병에 시달렸고, 순조 20년 즈음부터는 경연도, 신하들을 불러 일을 보는 것조차 뜸해지니, 급기야 영의정 김재찬이 아래와 같이 아뢰기에 이르렀습니다.

- 한가로이 계실 때가 많지만 신하를 접견하는 일이 드물고,
- 경연을 여는 날이 적어서 책을 한 권 끝맺을 기약이 없고,
- 백관이 나태해져서 한 가지 일도 진작시키지 못하고 각지에 일이 산적해있으나 자문하는 것을 볼 수 없고,
- 벼슬을 위해 세도가를 찾아가는 습속이 굳어졌는데도 단속하는 바가 없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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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순조에게도 즐거움이 있었으니 이는 그 아들 효명세자입니다.

순조는 효명세자의 배필로 풍양조씨 집안의 여식을 선택했는데, 그 이후 안동김씨와 풍양조씨가 정치적 세력 투쟁을 벌임으로써 정국이 혼란해지고 민생은 도탄에 빠지게 됩니다.

한편 병약한 순조는 순조 27년에 열아홉 살 효명세자에게 대리청정을 시키고 뒤로 물러나 나름대로 행복한 나날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효명세자는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어진 인재를 등용하고 형옥을 신중하게 하는 등 백성을 위한 정책을 구현하는데 노력을 기울였고, 순조는 이것이 기쁘고 고맙기 이를 데가 없었습니다.(권력이 세자에게 쏠리는 것을 전혀 부담스러워하거나 질시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효명세자가 대리청정 4년 만인 스물둘에 죽으니 순조의 슬픔은 매우 컸고 용안에 웃음을 찾아보기가 어려워졌으며 안 그래도 쇠약한 육신이 큰 슬픔을 감당할 수 없었는지 지병이 악화되어 병석에 누었다가 1834년(순조 34년) 45세의 일기로 눈을 감았습니다. 참으로 존재감 없는 임금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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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아침의 나라, 조선 연해에 이즈음부터 낯선 모양의 배들이 하나 둘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조선인들은 이 배들을 모양이 다른 배, 곧 '이양선(異樣船)'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이양선은 일찍이 산업혁명을 일으켜 부국강병을 이룬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등 서구 열강의 군함이거나 무장한 상선이었는데, 이양선의 조선 연해 출현은 이른바 서세동점(西勢東漸, 서양의 세력이 동양으로 점점 밀려 옴)을 나타내는 현상이었습니다.

마침내 조선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아무런 대책이 없는 가운데 거대한 외세의 해일에 직면하게 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