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135)> 헌종 철종 1- 순원왕후의 수렴청정

이찬조 2021. 5. 30. 21:42

<조선왕조실록(135)> 헌종 철종 1- 순원왕후의 수렴청정

 

1834년 순조의 뒤를 이어 손자 헌종이 새로 즉위하였으나 그 나이가 여덟에 불과하여 대비인 순조 비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맡게 되었습니다.

 

순원왕후는 명문가 중의 명문가라는 안동김씨의 딸로서, 그 아비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왕실의 큰 대우를 받은 김조순이었습니다.

 

비록 김조순이 죽고 없으나 순원왕후의 오라비들과 조카가 안동김씨의 영역을 강하게 구축중이었으므로 걱정할 것이 없었습니다.

 

순원왕후는 일찍 죽은 헌종의 아비인 효명세자를 왕으로 추승하였고, 이어서 당연히 효명세자의 비 조씨는 왕대비로 격상되었습니다.

 

순원황후는 왕대비 조씨의 아비 조만영을 호위대장에, 그의 동생 조인영을 이조판서에 앉히는 등 풍양조씨를 배려했고, 반남박씨도 우대했습니다. 독식하려다가는 다 죽는다는 김조순의 원칙을 이어받은 것입니다.

 

순원왕후는 7년간 수렴청정을 하며 정치는 안동김씨 가문의 오라비와 조카에게 맡기고 백성을 구휼하는 정책집행에 관심을 기울였으나, 삼정의 문란과 탐관오리의 수탈은 더욱 심해져만 갔으며, 그로 인해 백성은 떠돌고 나라의 곳간은 비어만 갔습니다. 나라가 망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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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조 때 정순왕후의 혹독한 탄압에도 천주교를 신봉하는 이들은 사라지지 않았고, 살아남은 이들은 지하로 숨어들어 신앙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신유사옥 때 처형된 정약종의 아들 정하상은 당시 어려서 목숨을 건진 후 커가며 조선 천주교의 핵심 인물로 성장했습니다. 그가 쓴 편지가 마카오의 포루투칼 총독을 거쳐 바티칸의 교황청까지 전달되었고, 교황은 조선 교구를 북경 교구에서 분리시키는 결정을 하는 한편, 신부 피에르 모방을 조선에 파견하였습니다.

 

피에르 모방과 정하상은 김대건 등을 마카오로 유학보내는 등 열성적으로 전도하였고, 곧 프랑스 신부 샤스탕, 엥베르가 입국하면서 조선 천주교가 암암리에 활성화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왕대비 순원왕후는 이들을 더 이상 두고 보지 않았고, 결국 1839년 6월 10일 신도 8명을 목 벤 것을 시작으로 정하상과 모방 등 서양신부들까지 그 해에만 70여 명이 처형당하였습니다.

 

1845년(헌종 11년) 마카오로 유학 갔던 김대건이 최초의 조선 신부가 되어 입국해 비밀리에 전도 활동을 폈으나 그 이듬해 체포되어 다른 신도들과 함게 모두 처형되었습니다.

 

이렇듯 가혹한 탄압에도 조선의 천주교는 뿌리 뽑히지 않았고, 서양인 신부의 파견 또한 계속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