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142)> 헌종 철종 8 - 씨가 마르다!!!
아편전쟁과 그 이후의 중국에 관한 소식은 간간히 사신을 통해 조선에 전해졌습니다.
대단히 제한적이고 단편적인 정보였지만 그 내용 자체가 충분히 충격적인 것들이어서 조선 조정이 술렁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 황제가 열하로 피신을 했다고? 진짜?
- 저들이 얼마나 세길래 중국이 붙었다 하면 깨진단 말인가...
1860년(철종 11년)에는 일본이 미국, 러시아 등과 강화조약을 체결했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조선에도 이양선의 출현이 더욱 빈번해졌습니다.
아직까지 별 탈 없이 넘어갔지만. 조만간 더 강력한 외세의 접근이 있으리라는 것은 중국이나 일본의 예를 보아도 너무나도 자명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조선 조정의 대비는 보이지 않습니다. 개항에 대한 고려도, 척사에 대한 다짐도... 논쟁의 흔적이 없습니다. 임진왜란 직전처럼, 정묘 병자호란 직전처럼 그저 요행히 넘어가길 바랄 뿐이었습니다.
반면, 민간에서는 의미 있는 대응이 있었으니, 동학의 발생입니다.
교주 최재우는 열일곱에 고아가 되고 장사, 유랑 등을 하며 지내다 수도에 전념해, 1860년 오랜 수도 끝에 강력한 종교체험을 겪은 후 주문을 만들고 포교문을 지어 포교에 들어갔습니다.
서학에 대응해 동학이라 이름 붙인 그의 학문은 국정의 문란으로 피폐해지고 서학, 이양선으로 상징되는 서양 세력의 위세에 불안해하던 백성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배우려는 사람이 연일 집 앞을 메웠습니다.
결국 조정은 최재우를 체포해 옥에 가두었으나 수많은 제자들의 석방운동으로 석방하였다가, 그 교세가 더욱 커지자 1863년 최재우를 체포해 한양으로 압송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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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도령 철종은 열아홉에 즉위하고 3년 만에 친정을 시작하였으나 더욱 견고해진 안동김씨의 권력, 게다가 왕실과 너무나도 먼 출신이라는 데에서 오는 열등감에 지원세력도 없어 재위 내내 허수아비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1864년 12월 철종은 두 달 넘게 이어 온 병세가 급격히 악화되더니 결국 세상을 떴습니다.
나이 33세에 재위 14년, 후사는 없었습니다. 정비와 후궁에게서 아들 몇을 보았지만 모두 죽었고, 결국 또 다시 왕가에 후사가 없는 일이 발생한 것입니다.
- 씨가 완전히 말랐다!(내시의 전언)
조정은 또 다시 종친 중에서 후사를 찾아야 했으므로 대신들은 수렴 너머의 신정왕후 조씨를 처다볼 수밖에 없었고, 그녀는 흥선군의 둘째 이명복으로 하여금 보위를 잇게 하겠다는 선언을 하였습니다.
드디어 흥선대원군이 전면에 나서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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