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143)> 고종 1- 대왕대비 조씨와 흥선대원군

이찬조 2021. 5. 30. 21:50

<조선왕조실록(143)> 고종 1

- 대왕대비 조씨와 흥선대원군

 

흥선군의 아들 이명복은 강화 도령 철종보다도 훨씬 왕실과 거리가 먼 인물이었습니다.

 

위로 거듭 거듭 올라가 사도세자에게 정조 외에 은언군, 은신군, 은전군이라는 서자가 있었는데, 은신군은 후사가 없어 인조의 아들 인편대군의 7대 손인 남연군을 양자로 들인 적이 있는데, 그 남연군의 아들 중 하나가 흥선군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흥선군의 아들이 보위라는 하늘이 준 행운을 거머쥘 수 있었는가

 

앞서 본 것처럼 정조 →순조 →(익종, 효명세자) →헌종 →철종으로 이어지는 임금의 비는 모두 김씨 가문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나 순조의 큰아들로서 왕이 되지 못하고 일찍 죽은 효명세자의 비만이 풍양 조씨였는데, 효명세자의 아들이 보위(헌종)에 오르게 됨으로써 자동적으로 효명세자는 ‘익종’으로 추존되었고, 이로 인해 효명세자의 비도 중전에 오르게 되니, 이 사람이 바로 신정왕후 조대비입니다.

 

신정왕후는 안동 김씨의 그늘에서 그저 왕대비로 존재감 없이 지내왔으나, 안동 김씨의 버팀목인 순원왕후가 철종 8년에 세상을 뜨고, 철종마저 후사를 남기지 않은 채 세상을 뜨자, 일약 임금을 지명할 권한을 갖는 유일한 종친이 되고 만 것입니다.

 

이즈음에 별 볼일 없는 종친 흥선군이 대왕대비 조씨에게 연락을 취해 왔습니다.

 

흥선군은 대왕대비 조씨에게 안동 김씨가 농단하는 현실을 바로 세우고 민생을 안정시켜야 한다는 당위와 실현할 방도, 의지를 전했습니다.

 

아울러 매력적인 제안을 덧붙였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둘째 아들을 대왕대비 조씨의 남편인 익종의 아들로 삼으라는 것이었습니다.

 

대왕대비 조씨로서는 왕이 되지 못하고 죽은 자신의 남편으로부터 왕실의 계통을 세울 수 있는데다, 임금의 나이가 12살에 불과하므로 수렴청정의 기회를 갖게 된다는 점에서, 이를 수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가만히 있었더라면 자신의 아들을 보위에 올릴 수 없었던 흥선군이 대왕대비 조씨와 교감해 자신의 둘째 아들을 보위에 올린 것입니다.

 

야사나 드라마에서는 대왕대비 조씨를 안동 김씨에 대한 복수에 눈 먼 여인으로 그리기도 하나 이는 사실이 아닙니다. 그녀는 흥선군과의 사전 교감을 통해 흥선군의 의견을 수렴청정이라는 방식으로 일선에서 시행한 흥선군의 국정 파트너이자 개혁파트너로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실제로 흥선군의 굵직굵직한 개혁조치들은 모두 형식적으로는 대왕대비 조씨의 언문 하교를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어쨌든 실질적인 칼을 든 사람은 이제는 흥선대원군! 신하들의 눈길은 12살 새 임금의 아비에게로 향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 상왕인 경우 말고 임금의 아비가 생존해 있었던 경우가 있었던가?

- 나이가 이제 44세라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