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164)> 망국 1 - 잃어버린 10년(1)
정변 실패 후 청의 영향력과 간섭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고, 20대의 위안스카이는 총독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이 와중에 정변을 부추키고 가담까지 했던 일본은 군함을 끌고 시위를 벌이며 조선에 책임질 것을 요구해 한성조약을 통해 넉넉한 보상을 받아갔고, 이토 히로부미를 전권대사로 삼아 리홍장과 담판해 텐진조약을 통해 조선에서의 상당한 영향력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수완을 부렸습니다.
김옥균 등 개화당의 꿈은 왜 3일천하로 끝날 수밖에 없었는가? 그들은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모델로 삼아 하루빨리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려는 사명감에 불탔으나 여러모로 부족했습니다.
국민적 지지를 얻지 못했고, 저항을 막아 낼 자체의 무력이 전혀 없었으며, 중국이 청프전쟁 때문에 간섭하지 못할 것이라는 정세오판이 있었고, 일본의 철저한 국익우선정책을 간과한 채 일본에 지나치게 의지한 정변이었으니, 실패는 어쩌면 당연한 것입니다.
설령 김옥균 등의 정변이 성공했다 하더라도 역시 일본의 예속을 피할 수 없었을 터이므로, 긍정적인 여러 시도에도 불구하고 이래저래 후한 평가를 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어찌되었든,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의 발발과 그 수습과정을 볼 때, 이제 조선이 스스로의 미래를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것이 확연히 드러났습니다.(이제는 마음대로 요리할 수 있겠는걸 ㅎㅎ)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을 통해 국내문제가 외세에 의해 국제문제가 될 수 있음이 확인되었습니다.
정변 이후 이러한 현상은 확연히 강화되었는데, 한반도를 완충지대로 삼아 일본, 영국 등 해양세력의 진출을 막으려는 러시아가 대표주자였습니다.
- 우리도 알고 보면 이웃사촌 아닙니까?
영국도 한반도에 말뚝을 박고 막무가내로 한자리를 차지하려 들었습니다. 1885년 조선은 영국으로부터 일방 통보를 받았습니다.
- 뜻밖의 일에 대응하기 위해 얼마간 헤밀턴을 차지해야겠다.
헤밀턴은 거문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영국은 다짜고짜 거문도를 점령하더니 군사기지를 만들고 그대로 주둔하였습니다. 조선이 반발하고 주변국들의 협조를 구했지만 소용이 없었고, 결국 2년이나 마음대로 있다가 떠나갔습니다.
고종과 중전은 러시아의 접근을 어느 정도 허용하였습니다.
- 일본도 중국도 믿을 것이 없으니, 차라리 러시아를 통해 견제를 시키자!
위기감을 느낀 중국 리홍장은 러시아에 붙은 뮐렌도르프를 해임하고, 고종과 중전에 대한 견제를 위해 잡아 두었던 대원군을 귀국시키는 조치를 취했습니다.
- 신경쓰일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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