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163)> 고종 21 - 갑신정변(4)

이찬조 2021. 6. 7. 20:40

<조선왕조실록(163)> 고종 21 - 갑신정변(4)

정변이 일어난 지 3일째! 김옥균 등이 과감한 시도로 권력을 틀어쥐긴 했으나, 그 토대가 없었습니다.

중국군 대장 위안스카이는 곧 상황을 파악했습니다.

- 국왕의 의지와 별개로, 소수의 젊은 애들이 약간의 일본군과 조선군 병력을 믿고 벌인 어처구니없는 불장난! 일본도 별 대책은 없어 보인다!

저녁이 가까워질 무렵, 위안스카이는 중국군대를 이끌고 궁궐 앞에 당도했고, 조선군 좌·우영 군사도 그 뒤를 따랐습니다.

압도적인 인원과 화력을 보유한 위안스카이는 포와 총을 쏘며 궐 안으로 밀고 들어왔고, 일본군과 소수 조선군이 맞섰으나 역부족이었습니다.

당황한 다케조에는 철수를 결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에 김옥균 등은 고종을 인천으로 모시고 가 후일을 도모하자고 주장하였으나, 고종이 응하지 않았고, 다케조에도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정변의 주역들은 모든 일이 이렇게 끝났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잠시 논의한 정변의 주역들은 살아남을 가능성이 가장 큰 홍영식, 박영교 등을 남기고,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은 다케조에를 따라 일본으로 가기로 결정하였습니다.

홍영식, 박영교는 아직도 상황을 파악 못하고 고종이 중국군대를 맞는 것을 막고 나섰다가,

- 전하께옵선 여기서 한 걸음도 움직여선 아니되옵니다. 어찰을 내려 위안스카이로 하여금 군사를 물리치라 명하소서.

그 자리에서 호위 군사들에게 난자당해 죽었습니다.

- 아니 저 역적놈 시키 좀 보소?

고종은 중국 군영에 몸을 맡겼다가 며칠 만에 창덕궁으로 돌아왔습니다.

- 군란 때 겪은 수모가 얼마인데 2년 만에 또 이런 수모라니...

정변 소식을 들은 백성들이 몰려나와 일본 공사관을 습격해 불태우고, 눈에 보이는 일본인들을 마구 공격했습니다.

- 이때 맞아 죽은 일본인이 39명이었습니다.

김옥균 등은 머리를 깍고 양복을 입고 일본 배에 올라 일본으로 도망갔으나, 고달프기가 이를 데 없었습니다.

- 조선에서는 송환을 요구하고, 자객을 보내는데 일본은 큰 뜻이 없어 보이니 어찌할 것인가.

조선에서 이들은 모두 역모로 의율(법적인 조건이 갖추어진 사실이나 행위에 대하여 법원이 법규를 적용함. 죄의 가볍고 무거움에 따라 법을 적용함)되어 가족들의 희생이 컸고, 홍영식의 아비는 아들의 역모를 한탄하며 손자에게 독을 먹여 죽이고 자신도 자결하였으며 박영효, 서재필의 아비와 서광범의 아내도 같은 길을 걸었습니다.

개화당 청년들이 색출되어 모조리 처형된 것은 물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