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166)> 망국 3 - 조선의 1894년(1)

이찬조 2021. 6. 7. 20:42

<조선왕조실록(166)> 망국 3 - 조선의 1894년(1)

혹세무민의 혐의로 한양으로 압송되던 동학 교주 최제우는 고종 즉위 즈음 효수되었습니다.

그러나 교주의 죽음에도 동학의 교세는 사그라지지 않았습니다.

외세의 접근에 불안해하고 탐관오리의 횡포에 절망하던 백성들은 동학에서 의지할 곳을 찾았습니다.

- 우리 동학은 신분의 귀천도 남녀도 차별하지 않습니다. (위아래가 없다고? 말도 안되는 소리 우린 양반이고 상놈과 노비는 당연한 것인데 이런 반사회적인 생각을 갖고 있다니 이런것이 이단이야)

그러나 동학을 믿는 것은 나라에서 금한 일이었으므로, 지방 수령들은 동학교도들을 붙잡아 탄압했습니다.

- 당장 주리를 틀 것이로되, 스무 냥만 내면 한 번 봐주지. 어쩔래?

동학은 지친 백성들의 폭발적인 지원속에 충청, 전라지역 으로 확대되어갔고,

이에 고무된 최시형 등 동학 지도자 들은 교주 최제우의 신원을 요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 우리가 왜 불법이고 왜 이단이란 말이냐!

1892년 신도 1천여 명이 공주에 모여 집회를 가졌고, 전라도 삼례에서 더 큰 집회가 열렸으며,

1893년에는 40명의 대표가 상소문을 들고 서울로 올라와 궐문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러나 조정의 반응은 싸늘했습니다.

- 속히 이들을 체포해 조사한 후 괴수에게는 형벌을 내리고 잔당은 잘 깨우쳐 돌아가게 하소서!

복합 상소가 효과를 보지 못하고 도리어 조정의 적극적인 탄압만이 뒤따르자 동학 지도부는 본격적인 실력행사를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 팔도의 모든 교인은 보은으로 모여라!

경기, 강원, 충청, 경상, 전라도의 교도들이 접주의 인솔 하에 모여들었는데,

여기에는 동학교도 외에도 수탈에 이골이 난 농민들, 다 뺏기고 고향을 떠난 유랑민들 등 등

세상에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는 많은 이들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보은집회는 종전 집회보다 훨씬 더 강력했고, 정치적 색채 역시 훨씬 강했습니다,

- 우리 수만이 죽기로 왜와 양이를 쓸어 대보의 의리를 본받고자 한다.

이에 조정은 서울의 군사를 파견할 계획을 세우고, 어윤중을 선무사로 파견하는 등 바짝 긴장했으나, 보은집회는 용두사미식으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 원인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동학 안에 강력한 정치적 색채를 갖는 세력이 꿈틀거리는데, 교주 최시형이 이를 통제하기 어렵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통제할 수 없는 강력한 세력! 이는 바로 전봉준이었습니다. 전봉준은 실망했습니다.

- 이게 뭐냐. 허무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