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175)> 망국 12 - 조선의 1894년(10)

이찬조 2021. 6. 19. 12:56
<조선왕조실록(175)> 망국 12 - 조선의 1894년(10)

조선 동학 농민군은 동학농민전쟁에서 가장 큰 전투이자 분수령이었던 12월 5일부터의 우금치 전투에서 관군, 일본군과 최선을 다해 싸웠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우금치 마루는 농민군의 시체로 뒤덮여갔습니다. 참혹한 패배였습니다.

압도적 수적 우세에서 나오는 자신감과 종교적 신념에서 나오는 용맹성으로 무장한 농민군이었지만, 현대식으로 무장한 소수의 일본군을 당해내지 못했습니다.

- 농민군은 남접 북접 합쳐 2만, 조선군 3천에 일본군 2천.

당시 농민군이 갖고 있던 총은 심지에 불을 붙여 쓰는 화승총으로 사정거리가 불과 100보에 분당 2발을 발사하는 수준인데다 그마저도 갖지 못한 사람은 죽창으로 싸워야 했습니다.

그에 반해 일본군은, 사정거리가 400-500보를 넘고 분당 12발을 쏠 수 있는 소총에다 막강한 화력의 미국제 개틀링 기관포까지 보유하고 있었으니, 화력에서 도저히 싸움의 상대가 되지 못했습니다.

이런류의 전쟁은 유럽에서도 있었는데. 독일군 최초 장갑차와 탱크앞에 하얀 백마를 타고 나타난 폴란드군 화력이 월등히 앞서니 쪽수가 많아도 계란으로 바위치기네

또한 여러가지 이유로 농민군 정예부대들이 모두 함께 싸우지를 못했고, 훈련받지 못한 농민군과 지도자들의 전투를 지휘하는 기술이 부족했으므로, 역부족이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이래서 제대로 훈련받은 전문가가 필요한거야)

우금치 전투 패배한 후 동학 농민군은 크고 작은 전투를 치러가며 후퇴를 거듭했고, 대오는 갈수록 줄어들었습니다.

11월 23일 태인 전투에서 또 다시 패한 뒤 전봉준은 세가 기울었음을 인정하고 계속되는 희생을 막기 위해 눈물을 머금고 농민군의 해산을 결정했습니다.

소식을 접한 손화중, 최경선 등의 동학 농민군도 해산령을 내렸습니다. 아울러 황해도, 경상도, 강원도, 경기도 각지에서 일어난 농민군도 일본군과 관군의 토벌에 백기를 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반외세, 반일본을 기치로 내건 동학 2차 농민 봉기는 이렇게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일본군은 반일을 기치로 내건 동학당을 완전히 소멸하라는 본국의 명에 따라 마치 비질하듯이 동학 농민군에 대한 대대적인 살육을 이어갔습니다.

- 1895년 1월까지 죽은 농민군이 20만이 넘었다!!!

동학지도자들도 모두 잡혀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김개남은 전주에서 체포되어 바로 처형되었고, 손화중은 고창에서, 전봉준은 순창에서 잡혀 각각 서울로 압송되었으며, 최시형도 체포되어 교형에 처해졌습니다.

전주성 전투를 하면서 농민군으로 최종적 승리를 얻을 수 없음을 진작 알고 있었지만, 피할 수 없는 시대의 부름을 받아, 죽더라도 싸워보고 죽겠다는 농민군을 이끌고 외로이 황야에 몸을 내던진 사내 중의 사내 전봉준! 그는 다음과 같은 시를 남기고 1895년 3월 손화중 등과 함께 처형되었습니다.

- 때가 오니 천지가 모두 힘을 합했건만
- 운이 다하니 영웅도 스스로 도모할 수 없구나
- 오로지 백성을 사랑하는 정의였으니
- 나라를 위하는 단심을 누가 있어 알아줄까

외세가 들어와 정사를 참견하고 모든일에 제동 거는것엔 나라가 아무힘을 못쓰면서 인간평등 부르짖는 동학군은 때려잡아죽일 적이되었다.

일본군이 '우리가 잠재워줄까?'
달콤함에 조선조정과 조선군은 그리도 좋았을까?
우리농민을 도륙하는일인데~~
우리가 손잡을 때 아무도 못건드린다는 걸 왜 몰랐을까?
승리도 못함을~~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