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왕조실록

고려왕조실록 3 - 태조 2

이찬조 2021. 7. 8. 20:44

*궁예 오른팔을 얻고 왕건은 승승장구....

 

후고구려의 건국자 궁예의 성은 김 씨입니다.

아버지는 신라 제47대 헌안왕이고 어머니는 궁녀이었다고 합니다.

 

궁예는 태어나자 이빨에 이상한 빛이나 장차 해로운 인물이 될 것이라는 의심을 받았는데 이를 믿은 왕이 죽일 것을 명하였습니다. 궁예는 외가에서 출생 하였는데 사자들이 달려가 강보에 싸인 아기를 다락 밑으로 던져버렸는데 이를 유모가 받아내어 죽지 않았다고 합니다.

 

궁예가 애꾸눈이 된 것은 유모가 궁예를 받아낼 때 손가락으로 눈을 잘못 건드린 것 때문이라고 합니다.

왕족으로 태어났으나 신분없는 신세의 궁예는 ‘세달사’라는 절에 몸을 의탁하여중이 되어 승려 생활을 하게 됩니다. 

 

이 시기는 신라의 국운이 다하여 곳곳에 반란과 도적들이 횡횡하고 이들 가운데 두각을 나타낸 자가 기훤과 양길이라는 자인데, 궁예는 기훤을 찾아가 그의 부하가 되기를 원했으나 기훤이 애꾸눈 병신이라고 받아주지 않자 양길의 부하가 됩니다.

 

궁예가 양길에게 충성하자 양길은 얼마간의 부하를 나누어주고  궁예는 이들을 데리고 운주 치악산의 석남사를 비롯하여 어진(지금의 울진)까지 여러 현과 성들을 정복하고 명주(강릉)까지 이르게 되는데 이때는 이미 부하가 3500명 이상이 되었습니다. 궁예는 부하들을 14개 부대로 편성하여 세력의 기반을 구축하였고 장군으로 추대가 되기까지 합니다.

 

짧은 기간에 세가 많이 불어나긴 하였으나 백제의 견훤이나 여타 지방호족들에 비하면 아직은 미약하기가 이를데가 없었는데 그즈음 왕건 부자를 얻게  된 것입니다.

 

이어지는 왕건의 빛나는 전공을 감안하면 궁예는 자신을 천하의 주인이 되게 하여줄 만한 영웅을 얻은 셈이었습니다.

 

왕건이 역사의 주역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900년부터인데, 궁예는 왕건에게 명하여 광주 충주 등 3개주와 당성(남양주), 괴양(괴산)을 정벌토록 하였는데 왕건은 이를 평정하고 아찬(阿飡, 국장-차관급 벼슬로, 장관은 대아찬 이라함.)의 벼슬에 오르게 됩니다.

 

여러 전쟁에서 전공을 세운 왕건은 궁예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게 되었고, 특히 변방 방비사업에 대한 어전회의에서 왕건의 막힘없는 대책 설명은 모든 대신들을 감복시키고 궁예 또한 감탄하여 그를 중용하게 됩니다.

 

이처럼 왕건은 전쟁에서의 연승과 궁내에서의 입지강화로 승승장구하고 있던 차, 아주 중대한 일이 정주 지방에서 있었는데, 이는 훗날 왕건이 고려를 창건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신혜왕후 유씨를 만난 일이 그것입니다.

 

신혜왕후 유씨는 정주 사람들이 장자라 부르는 정주의 대 부호 유천궁의 딸입니다.

 

어느날  군사를 거느리고 정주 땅을 지나가던 왕건은 버드나무 고목 아래에서 말을 멈추고 쉬던 중 냇가에 서있는 덕이 넉넉하게 깃들어 보이는 유씨를 발견하고 다가가 물었습니다.

 

 “그대는 누구의 여식인가?” “이 고을 장자의 집 딸입니다”  이를 인연으로 왕건은 그날 밤 유천궁의 집에서 묵게 되었는데 유천궁이 친히 나와 융숭한 향연을 배풀었습니다. 유천궁은 왕건의 빛나는 기상을 알아보고 딸로 하여금 하룻밤 합궁케 하였습니다.

 

요즘 같으면 생각지도 못할 일 ---, 강제로 달라고도 안했는데, 아무리 인물이 출중해 보여도 처음 본 놈에게 첩도 아닌 딸을 하룻밤 줘버려? 

 

 이처럼 말도 안되는 일을 유천궁은 저질러 버리는데 그만큼 왕건의 인물됨을 알아 본 것이겠지요.

영웅은 영웅만이 알아본다고 유천궁도 참 대단한 사람입니다.

 

아무튼 하룻밤 지방 호족의 딸을 품은 왕건은 이튿날 떠나기 전에 약조를 하였습니다.

 

“잊지 않고 반드시 찾을 것이오. 부디 기다려 주오.” 이후 왕건은 나주지방의 지배권을 단단히 다지는데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던지라 유씨와의 약속은 잠깐 잊고 있었습니다.

 

한동안 평온하던 나주지방이 견훤의 공격을 받아 위험에 처하자 왕건은 군사를 이끌고 출병하게 되었는데 공교롭게도 정주에 이르러 다시 쉬어 가게 되었고 그동안 잊고 있던 유씨 처녀를 찾았으나 유씨 처녀는 집에 없었습니다.

 

유씨는 정절을 지키다 지쳐서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일편단심 민들레 유씨에게 감동한 왕건은 나주지방을 안정시킨 후 유씨를 정식부인으로 삼게 됩니다. 참 대단한 여인입니다.

 

903년에 처음 만나고 913년에 다시 만나 부인이 된 것이니, 천지신명의 뜻이 아니라면 이런 인연이 이루어 질 수 있겠습니까.

 

만 10년을 기다리다 정조를 지키려 머리를 깎아 버렸다니 요즘 같은 세상에는 어림 반품도 없는 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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