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왕조실록

고려왕조실록 15 - 혜종 1

이찬조 2021. 7. 13. 07:35

고려왕조실록 15 - 혜종 1

*태조 왕건의 고뇌와 혜종의 등극

비록 삼한을 통일하였으나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지방 호족들 때문에 태조는 왕권중심으로 한 중앙정부의 통치 체계를 갖출 수 없었다는 점은 앞장에서 서술한 바가 있습니다. 해결책으로 태조는 호족들의 딸과의 혼인을 통해 인척관계를 맺음으로써 통일 왕국 내부의 위협적인 요소들을 제거하려 하였고, 이것이 먹혀들어 태조 왕건 당대에는 커다란 충돌이 없이 국정을 펼처 나갈 수 있었으나 후사 문제만 생각하면 골치가 아팠습니다.

당장 29명이나 되는 아내들 뒤에 있는 막강한 호족들의 힘이 태조를 압박해 오는 것만 같았습니다. 태조는 6명의 왕후와 23명의 부인들 사이에서 25명의 아들과 9명의 딸을 두었습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제1비인 신혜왕후 유씨에게서는 소생을 얻지 못하여 둘째 부인 장화왕후 오씨가 낳은 무(武)가 자연스레 왕위 승계 1위가 됩니다.

태조는 일찍이 무에게 임금의 자질이 있음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러나 선뜻 그를 태자로 봉할 수는 없었습니다. 무의 어미 장화왕후 오씨의 신분이 너무 미천하여 뒷받침 해 줄 가문의 힘이 없어 신하와 백성, 왕실사이에서 팽을 당할까 염려스러워서입니다. 본인 역시 혼자만의 힘으로는 국가통치가 어려워 처가들의 힘을 빌리고 있는 형국이 아닌가- 당장이야 문제가 일어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본인이 죽고 나면 왕위계승 문제를 놓고 지방호족들이 들고 일어나 나라 안이 혼란스러워질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태조의 가슴을 찍어 누르고 있었습니다. 

고심고심하던 태조는 태자 책봉을 뒤로 미뤄오다 하루는 옷상자에 자황포(임금의 옷)를 담아 장화왕후에게 전해 줍니다. 왕후는 상자를 열어보고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대광 박술희를 불러 자황포를 보여 주었는데, 자황포를 보고 임금의 뜻을 알아차린 박술희는 대전으로 나아가 왕자 무를 태자 삼기를 공개적으로 주청하게 됩니다. 말하자면 신하의 입을 빌려 본인의 뜻을 실현시키고자 한 것이지요. 그리하여 마침내 태조는 박술희의 청에 따라 왕자 무를 태자에 봉하게 되는데 이때가 921년 입니다.

박술희는 18세에 궁예의 호위무사로 있다가 훗날 태조 왕건을 섬긴 사람으로 성질이 용감하였으며 고기를 즐겨하여 두꺼비, 개구리, 개미에 이르기까지 닥치는 대로 잡아먹었다고 합니다. 그는 전쟁터에 나가 여러 번 공을 세우고 태조의 총애를 입어 대광(大匡 ; 종1품으로 차관정도 품계)이 되었으며, 후에 혜종이 즉위하는데 결정적인 공을 세우게 됩니다. 또한 그는 태조가 임종 할 때 고명을 받기까지 하였는데 태조는 그에게 군국대사(軍國大事 ; 군과 행정부의 중요한일)를 부탁하며 “그대가 태자를 부축하여 세웠으니, 잘 보좌하라.” 는 고명을 받게 됩니다.

박술희는 태조의 유언을 지키려고 모든 정성을 다하였으며 뒷날 왕위 쟁탈전의 틈바구니에서 정도를 지키다 목숨을 잃고 맙니다. 그는 면천박씨(沔川朴氏)의 중시조이며, 후대의 왕들이 거울로 삼아 치세를 하도록 한 훈요십조를 태조로부터 직접 내려 받은 인물이기도 합니다.

태자는 이미 책봉이 되었으나, 신명순성왕태후가 왕자 태(泰)를 생산하고 923년 왕자 요(堯)를 낳고 또 2년 뒤 왕자 소(昭)를 생산하자 왕위 계승을 둘러 싼 분쟁의 험한 불씨가 점화되기 시작합니다. 신명순성왕태후 유씨는 충주의 대호족 유긍달의 딸인데, 충주는 백제와 신라를 잇는 교통의 요충지인데다 신라의 귀족들이 많이 거주하는 곳으로 태조가 삼한을 통일할 때도 아주 큰 역할을 했던 중요한 지역으로서, 태조 역시 충주를 대표하는 유긍달을 제어하고 그의 힘을 자신에게 보태려고 전국 통일 직후에 신명순성 왕태후 유씨를 제3비로 맞아들인 것입니다. 말하자면 정략결혼이지요.

아무튼 태자 무는, 이렇듯 강력한 지원 세력을 등에 업고 태어난 그 존재만으로도 위협적인 신명순성왕태후의 소생 왕자들, 시한폭탄과 같은 그들을 지척거리에 두고서 왕위에 오르니 그가 고려 제2대 왕 혜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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