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왕조실록 20 - 정종 2
*살상의 죄과가 너무 무겁구나....
앞장에서 언급하였듯이 많은 사람을 희생시키며 권좌에 오른 정종은 수도 개경에서의 생활이 불안하여 서경 천도를 실천에 옮기려하였습니다.
겉으로 내건 천도 사유는 풍수지리상 서경이 개경보다 국운에 유리하다는 것과 북진 정책을 추진하는데도 서경이 더 유리하다는 이유를 들고 있지만 사실상 인간적인 관점에서만 보더라도 정종은 개경에 머물고 싶은 생각이 없었을 것입니다.
왕위쟁탈 과정에서 숱하게 피를 본 정종은 심리적 압박에서 좀처럼 헤어나지를 못합니다. 원래 불심이 깊었던 그는 불사리를 받들고 10리나 되는 개국사까지 걸어가서 이를 모시는 한편, 곡식 7만석을 사원들에게 헌납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거란에 포로로 잡혀있던 최광윤이 놀라운 소식을 전해 옵니다. 거란이 고려를 침공하려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정종은 당황하지 않고 이 기회를 이용하기로 마음먹고 관군 30만명을 조직하여 거란의 침공에 대비하는 한편 이를 왕권강화의 기회로 이용하였습니다.
군권을 장악하고 있는 임금을 상대로 반란을 꾀할 신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집권과정에서 흘린 수많은 피에 대한 자책감에서였는지 심신이 쇠약해진 정종은 곧 병이 들고 맙니다.
948년 9월이었습니다. 동여진의 대광 소무개가 와서 말 7백 필과 토산물을 바치자, 정종은 친히 천덕전에 나와서 그 물건들을 점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홀연 하늘을 요란하게 흔들어대며 천둥소리가 울리며 궁전 서쪽 모퉁이에 벼락이 떨어졌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자신의 죄과로 하늘을 두려워하던 정종은 그길로 병환이 심각해져 자리에 들어 눕고 맙니다.
이듬해 봄이 되어도 일어나지 못하던 정종은 때마침 왕식렴이 죽었다는 비보까지 날아들자 더욱 상심하여 병이 더 깊어져 회복불능 상태에 이르게 되고, 그로부터 2달 뒤 마침내 아우 소(광종)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오래지 않아 숨을 거두었습니다.
정종은 성품이 온화하고 불교를 좋아하였으며, 겁이 많았습니다.
도참사상을 시빙하여 무리하게 서경으로 천도하려던 그가 죽자 모든 계획은 중단되었으며, 고된 부역에 시달리던 백성들은 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 날뛰었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 짚어보고 갈 문제가 있습니다. 정종의 서경 천도를 둘러싸고 개경파와 서경파가 대립하였다는 것은 이미 서술한 바가 있습니다.
공교롭게도 서경 천도를 주도한 왕식렴과 정종이 거의 같은 시점에 죽었다는 점입니다.
더군다나 왕식렴의 사망에 대한 이유는 어떤 사료에도 기록이 없습니다.
개경파와 서경파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가운데 자연사가 아닌 타살이 아닌가하는 의심을 해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또한 정종의 죽음도 석연치 않은 대목이 많습니다. 천둥소리에 놀라 일어나지 못할 정도로 병이 깊어져 죽었다고 하는 말입니다.
물론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혹시 배후에 개경파를 중심으로 한 광종과 박수경이 도사리고는 있지 않았는지 의심이 가는 점이 많습니다.
아무튼 재위기간 4년에 서경 천도 기획 외에는 별다른 실적이 없는 정종은 27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등지고, 고려의 왕들 중에서도 많은 치적을 쌓은 광종의 시대가 열립니다.
'고려왕조실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려왕조실록 22 - 광종 2 (0) | 2021.07.17 |
---|---|
고려왕조실록 21 - 광종 1 (0) | 2021.07.17 |
고려왕조실록 19 ㅡ 정종 1 (0) | 2021.07.16 |
고려왕조실록 18 - 혜종4 (0) | 2021.07.14 |
고려왕조실록 17 - 혜종 3 (0) | 2021.07.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