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왕조실록

고려왕조실록 21 - 광종 1

이찬조 2021. 7. 17. 09:16

고려왕조실록 21 - 광종 1
* 최후의 승리자

태조 왕건이 삼한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그리고 통일 후 나라의 기틀을 다지는 과정에서 지방 호족들과의 혼인을 결속의 수단으로 이용하였다는 사실은 앞에서 몇 회에 걸쳐 서술한 바가 있습니다. 이 때문에 왕가와 지방 호족간의 기형적인 공존형태가 시작되었고 상황에 따라서는 왕가와의 혼인을 빌미로 오히려 기존의 자신의 파워 보다 훨씬 강력한 세력을 구축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단지 한울타리의 가족관계이니까 왕가에 대항하여 반란을 도모할 염려가 없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이는 훗날 피비린내 나는 왕권 쟁탈전의 빌미가 되기도 한 것입니다.

혜종과 정종의 시기를 거처 광종의 집권이 이루어진 7년 가까운 시기에 2천명 이상의 사람들이 희생되었음은 역사의 기록을 통해 알 수가 있습니다.

아무튼 광종 대에 이르러서야 태자들의 왕권 쟁탈전은 막을 내렸고 광종은 최후의 승리자가 되어 명실 공히 고려왕조의 기틀을 다지는데 전력을 기울일 수가 있었습니다.

광종은 집념이 강하고 참을성이 있으며 치밀한 성격에다 큰 것을 위해서는 작은 것들은 과감히 버릴 수 있는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혜종이 죽고 광종의 동복형 정종이 즉위하자 왕권 쟁탈전은 끝이 난 것처럼 보였습니다. 한 배에서 나온 형제에다 오랜 세월을 서로 이끌어 주며 왕권 쟁취를 위하여 서로를 뒷받침 해온 사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종이 후에 서경 천도를 고집하고 밀어붙이자 두 사람 간에는 갈등이 생기기 시작하였습니다. 물론 그것만이 원인은 아니겠지요. 원래 권력의 속성은 부자간도 원수로 만드는 법이 아니겠습니까. 게다가 그들을 둘러싼 지지 세력들의 갈등은 아주 심각한 형태로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정종은 왕식렴을 주축으로 하는 서경파의 지지를, 광종은 평주를 기반으로 하는 박수경과 첫째부인 대목왕후 황보씨의 황주세력을 지원 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정종이 광종에게 왕위를 물려준 과정에 다소 의문이 생깁니다. 왕위를 은밀히 동생 광종에게 양위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으니 의문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동안 광종이 왕실의 친족들은 물론 자신의 아들까지도 의심하여 숙청의 대상으로 삼으려 했던 그의 행적을 감안 할 때, 정종이 왕위를 아우 광종에게 양보하고 죽음에 이르는 과정에 대한 기록이 전무하니 미스터리로 판단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어찌됐든지 간에 박수경과 처가세력을 등에 업고 왕위에 오른 광종은 형 정종처럼 무리한 정책을 펼치는 대신에 한동안 관망하는 태도를 보이면서 민심을 수습하는 데만 전력을 기울였습니다.

급격한 변화를 무리하게 시도하게 되면 늘 그에 상반되는 반역을 불러일으키기 마련입니다. 아버지 태조의 사망 후, 계속된 왕권쟁취를 위한 정쟁의 그 밑바닥에는 왕권을 위협하는 지방호족들이 있었음을 광종은 잘 알고 있었기에 호족들 간의 이권의 행방이 갈리는 천도와 같은 무리한 정책의 변화는 피하는 대신에 내외로 안정을 꾀하면서 이를 바탕으로 강력한 왕권을 키울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하는데 전력을 집중합니다. 이에 따라 고려의 내부는 실로 오랜만에 평온한 시절이 찾아왔습니다.

당대 제일의 지식인 최승로는 “광종의 집권 초 8년은 가히 삼대(하,은,주 3대)의 그것과 견줄 만하다”고 격찬할 정도로 평온한 세월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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