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왕조실록

고려왕조실록 42 - 정종1

이찬조 2021. 7. 24. 09:51
고려왕조실록 42 - 정종1
* 실리 외교를 추구하다

정종은 이름은 형(亨)이요, 자는 신조(申照)로 동복의 형 덕종으로부터 유언을 받아 1034년 9월 17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습니다.

정종은 등극하자 전국에 대 사면령을 내리고 치세의 틀이라고 할 관료들의 직위와 인물을 새롭게 선정하였습니다.

이때 정종에 의해 중용된 인물 중 황주량과 최제안이 있는데, 황주량은 거란의 침입으로 소실된 역대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여 덕종1년 1032년에 태조에서 목종에 이르는 칠대실록 36권을 완성시킨 사람으로 한림원과 사관의 요직을 두루 지냈으며 과거를 주관하기도 하였습니다. 최제안은 1020년 현종 11년 천령절을 하례하려고 거란에 다녀 온바가 있었으며 태조의 훈요십조가 병화로 망실되었을 때 최항의 집 서고에서 이를 발견하여 후세에 전해지도록 한 사람입니다.

1031년 거란은 성종이 죽자 혼란 속에 빠져들었습니다. 성종의 뒤를 이어 16세 밖에 안 되는 어린나이의 홍종이 즉위하였는데 직접 치정이 어려운 상황인지라 흠애태후가 섭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불만을 품은 성종의 사위 소필적이 홍종을 폐위하려고 모의하다가 죽임을 당하는 등 정치적 혼란이 극에 달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고려의 덕종은 거란의 혼란을 틈타 압록강의 다리를 철거하고 두성을 헐어내어 고려의 영토를 돌려줄 것과 거란에 억류 중인 고려 사신들을 송환하라고 요구하였습니다.

앞장에서 기술한바와 같이 거란은 이 같은 고려의 요구를 거절하였고 이 때문에 국교가 단절된 채 두 차례나 전쟁을 치르게 되었습니다, 상대가 강국이라 하여 무조건 굽히고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요구할 것은 요구하면서 그것이 관철되었을 때 평화를 모색해 나가는 것. 덕종의 외교정책은 이렇게 압축하여 정리할 수 있습니다.

덕종의 뒤를 이은 정종 또한 즉위한 이듬해인 1035년 7월에 거란은 사신을 보내 화친을 종용하는데, 이에 정종은 덕종이 펼친 외교정책과 동일한 방식을 내 보였습니다. 거란이 보내온 통첩의 내용은, 자신들은 지금 광대한 영토를 통치하고 있으며, 남쪽의 모든 나라들이 자신들의 올바른 정치를 본받으려 노력하고 있는데, 고려는 이러한 성의를 보이지 않고 있으니, 만약에 우리 황제께서 뇌성벽력 같은 위엄을 보인다면 고려의 백성들이 편안 하겠는가 하고 완전 협박에 가까운 내용이었습니다.

이에 정종은 목종과 마찬가지로 압록강의 다리를 철거한 일, 성벽을 허물고 옛 고구려의 영토를 회복한 일들에 대해 조목조목 반박을 하고, 사신을 돌려보낼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이는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명이었습니다.

한동안 소식이 없던 거란은 1037년 10월 해군을 동원하여 압록강을 통하여 처들어왔습니다. 초기에 일순간의 동요는 있었으나 이미 거란의 침입에 대비를 하고 있었던지라 준비를 철저히 해왔기 때문에 고려는 침착하게 대처를 하였고 강력한 반격을 하게 됩니다.

거란 역시 덕종 조에 2차례의 패배를 경험한 바가 있었기 때문에 함부로 군대를움직이지 못하고 관망을 하다가 결국은 고려의 요구를 들어주고 억류되었던 사람들이 되돌아오자 국교를 다시 맺게 됩니다.

이후 두 나라는 상호 호의적인 분위기가 지속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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