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왕조실록

고려왕조실록 43 - 정종 2

이찬조 2021. 7. 24. 10:07
고려왕조실록 43 - 정종 2
* 천리장성의 축조와 노비제도 정립.

고려 후기의 대학자 이재현의 평을 보면 정종이 거란과 화친을 맺은 것은 진심으로 그리한 것이 아니고 기묘한 책략이었다고 단정을 짓고 있습니다. 단지 선대 임금의 유업을 계승하여 국가를 보전하고자 한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이를 뒷받침하듯 정종은 거란과 우호관계가 회복되었음에도 덕종 대에 시작된 천리장성의 축조공사를 계속 추진하여 완성을 시킵니다.

압록강에서 동해의 도룡포까지 장성이 완성되자 고려는 북방민족의 침입에 대한 걱정으로부터 한결 자유로워졌습니다. 이는 고려의 군사력을 드높이는 계기가 되었고 정종은 이러한 안정감 속에서 새로운 제도들을 속속 도입하게 됩니다.

정종은 1039년 천자수모법(賤者隨母法)을 제정하여 노비의 신분이나 종사하여야 할 역처, 그 주인을 결정할 때 모계를 따르도록 규정하였습니다.

고려시대에는 적처(嫡妻) 두세 명에, 노비를 첩으로 둘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양인녀(良人女)는 적처가 되는 것이고, 노비는 첩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적처 자식과의 혼란을 막기 위해 비첩의 자식은 노비를 삼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천자수모법의 근간입니다.

보다 상세히 설명을 하자면, 노비 상호간의 혼인으로 생긴 자식의 소유권을 비(여자 노비)의 소유주에게 귀속시킨다는 법규입니다. 이는 노비의 자식들이 어머니만 알고 아버지는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는 사실과, 어머니 쪽이 중요시 되는 토속적인 혼인풍속을 배경으로 나타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한 비가양부(婢嫁良夫 : 여자 종과 양인 남자의 혼인)의 경우에도 적용되어, 자식은 어머니의 신분과 같이 노비로 하고, 비의 주인이 이를 소유할 수 있도록 하였는데, 이는 당시 노비를 소유하고 있던 지배계층들의 지속적인 노비 증식의 방편으로 활용되었습니다.

또한, 후삼국의 통합과정에서 양인(良人)들이 유역체계(有役體系)에서 이탈하거나 전쟁포로로 노비가 됨으로써 양천(良賤)의 신분이 뒤섞이고, 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양천교혼[良賤交婚 : 비가양부와 노취양녀(奴娶良女)의 두 유형]이 증가되어, 신분상의 혼란도 법 제정의 배경이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고려는 처음부터 양천교혼을 원칙적으로 금하고 있었습니다. 이를 어기는 당사자는 물론 사실을 알고도 묵인한 노비의 주인도 처벌을 하였습니다.

특히, 노취양녀(奴娶良女 : 양인 여자와 남자 종의 혼인)는 강상(綱常)의 윤리를 문란하게 한다는 이유에서 더욱 엄격하게 규제하여 극형에 처하였습니다. 그러나 양천교혼이 근본적으로 억제될 수 없다 보니, 천자수모법의 보완조처로서 일천즉천(一賤則賤, 한쪽이라도 노비신분이면 자손도 노비)의 원칙을 마련하였습니다.

즉, 비가양부의 자식은 천자수모법에 따라, 노취양녀의 자식은 일천즉천의 원칙에 따라 노비로 하되, 각각의 부모 소유주가 자식들도 소유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천자수모법과 일천즉천의 원칙은 고려 후기 이래의 사회적 혼란에 편승해 양인의 감소와 노비의 증가라는 문제를 유발시켰습니다.

그러다가 원(元)나라의 간섭 시기에 정동행성평장사(征東行省平章事) 활리길사(闊里吉思)가 고려의 이 노비제도를 혁파하려 하였으나, 고려 조정의 완강한 반대로 결국은 실패하고 맙니다. 이후 권력층의 농장 확대와 홍건적(紅巾賊)의 침입으로 양인의 감소와 노비의 증가는 더욱 심화되었습니다. 그 후로도 몇 차례에 걸쳐 노비의 변정사업(辨正事業)이 있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둘 수 없었습니다.

1392년(공양왕 4) 양천교혼은 금지하되, 특례로 이제까지의 교혼소생은 양인이 되는 신분 상승 조치를 취하게 됩니다. 이를 계기로 천자수모법과 일천즉천법은 퇴색하고, 양인의 확대를 목적으로 한 종부법(從父法)이 태동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후, 이씨조선에 접어들어 1397년(태조6)에는 노비합행사의(奴婢合行事宜)에 따라 양부의 자기비첩산(自己婢妾産, 자신의 노비나 첩에서 나온 자식들)도 양인이 되었고, 1405년(태종5)에는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비첩산까지도 양인이 될 수 있게 하였습니다. 1414년에는 타인비첩산을 포함한 비가양부 소생을 아버지의 신분에 따라 양인의 신분을 갖도록 하는 종부법(從父法)을 마련하였습니다.

다만, 적처에 대한 우대로 서얼차대법을 실시하여, 양반의 자식일 경우는 양반으로, 첩이나 노비의 자식은 양반은 되지 못하고, 양인, 혹은 중인이 되어야 했습니다. 아무튼 이는 고려시대보다는 발전적인 제도라 할 수 있겠습니다. 고려시대에는 천자수모법에 따라 서얼은 노비가 되어야 했으나, 조선에서는 종부법에 따라 양인이나 중인은 되었으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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