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왕조실록 60 - 인종 4
* 묘청의 난.
정치가 권력이라는 단물을 내포하고 있는 한 그것을 더 많이 차지하려는 대립과 암투는 피할 수 없는 것인가 봅니다. 이자겸의 난이 정리 된 후, 개경의 문벌귀족 가운데 크게 부상한 것은 김부식 형제와 이공수(李公壽), 지저(之氐) 부자 그리고 새로이 외척이 된 임원애(任元敳) 등이었습니다.
이자겸 이래로 이들은 당시 동아시아의 새 강자로 등장한 금나라에 대해 신하의 예를 취하는 등의 외교로 대외적인 안정을 꾀하며 정권을 주도했습니다. 한편 척준경을 탄핵하는 등의 공로를 세운 정지상과 그의 천거로 등장한 묘청, 백수한(白壽翰) 등의 세력이 대두되었는데, 이들은 개경 문벌귀족과는 배경을 달리하는 서경출신의 신진관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당시 유행하고 있던 지리도참설(地理圖讖說)과 칭제건원(稱帝建元), 금국정벌론(金國征伐論) 등을 내세우면서 서경천도 운동을 벌여 개경에 기반을 둔 문벌귀족세력을 누르고 정치적 권력을 장악하려 합니다.
이러한 주장은 인종의 마음을 움직여 1128년(인종 6) 11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에 걸쳐 묘청의 주장대로 임원역지(林原驛地)에 대화궁(大華宮)을 짓고 이어서 1131년에는 그 궁성 안에 8성당(八聖堂)을 두는 등 설비를 갖추고 자주 순어(巡御)를 했습니다. 그러나 김부식을 중심으로 한 개경 문벌귀족들의 반대로 천도운동이 난관에 부닥치고 결국은 천도 자체가 무산될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자신들이 의도했던 서경천도가 무산되자, 1135년 정월에 묘청은 분사시랑 조광(趙匡), 분사병부상서 유참(柳旵), 분사사재소경 조창언(趙昌言) 등과 더불어 반란을 일으킵니다. 이들은 먼저 개경출신의 관리들을 모두 제거함과 동시에, 서경의 분사조직체를 장악하고, 서경과 개경 사이의 군사교통상의 요충지인 자비령을 차단하여 버립니다.
그러고는 국호를 대위(大爲), 연호를 천개(天開), 군대의 칭호를 천견충의군(天遣忠義軍)이라고 하며 새로이 나라를 세웠다고 공표를 합니다.
이 반란은 칭제건원은 하였으나 국왕을 새로이 옹립하지도 않았고, 그들 스스로가 국왕에게 거병소식을 알리는 등, 왕권 자체에 대한 도전이 아니라 개경의 문벌귀족 타도에 목적을 둔 것이었습니다.
반란의 소식을 접한 조정은 김부식을 총책임자로 하는 토벌군을 편성하여 반란군에 대처하게 합니다. 김부식은 먼저 정지상, 백수한, 김안 등을 서도(西都)의 모반에 관여했다는 명목으로 처단하고 토벌에 나서게 됩니다.
김부식이 지구전법을 쓰며 여러 차례 항복할 것을 종용하자 조광은 묘청과 유참, 유참의 아들 호(浩) 등의 목을 베어 그 수급을 윤첨 등에게 들려 보내면서 항복할 뜻을 비쳤습니다. 그러나 고려 조정에서 윤첨 등을 옥에 가두는 등 강경책을 쓰자, 조광 등은 설령 항복을 해보았자 죄를 면치 못할 것으로 판단하고 끝까지 대항을 하게 됩니다.
천도파군은 서경과 그 주변지역의 민중들의 호응을 받으며 결사적인 항쟁을 전개했으나, 이듬해인 1136년(인종 14) 2월 관군의 총공격을 받아 서경성이 함락되니, 묘청이 난을 일으킨 지 거의 1년 만에 진압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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