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왕조실록

고려왕조실록 67 - 의종 6

이찬조 2021. 8. 9. 06:56

고려왕조실록 67 - 의종 6

- 왕이 신하의 손에 죽다.

 

살아남은 문신들은 숨을 죽이고 숨을 곳을 찾기에 급급하였으나 그래도 임금을 모시던 궁내 환관 몇명이 무신들의 반란에 대한 저항을 해보았으나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맙니다.

 

 

내시와 환관 10여명이 정중부 일당을 치려고 모의를 꾸미다가 잡혀 죽는 작은 사건이 발생하자 이에 정중부는 의종을 거제도로, 태자를 진도로 유배 보내고 의종의 동생을 새 임금(명종)으로 추대하니 무신들의 잔인한 쿠데타는 완벽하게 성공하게 됩니다.

 

이자겸이나 묘청의 반란 때보다도 더 무지막지한 살육이 자행되었으며, 특히 서로 전투를 벌인 것이 아니라 평소에 마음에 들지 않았던 문신들은 모두 찾아내 일방적으로 죽여 버렸는데, 죽은 벼슬아치의 수로 따지면 가장 큰 규모의 반란이었습니다.

 

사실 무신들이 정변을 일으켰을 때는 성공을 자신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문벌 귀족이 워낙 강한 데다 정변 자체가 치밀한 계획하에 일어난 것도 아니었고 게다가 힘있는 문신에게 들붙어서 이익을 챙겼던 일부 무신들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막상 일이 터지자 예상 밖으로 군인들이 잘 움직여 주었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무신에 대한 차별이 워낙 심하다 보니, 군인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한 장교들이 많았고, 대부분 농민출신인 병사들은 상관 무신들 보다 문벌 귀족들에게 더 큰 불만을 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앞서 묘청의 서경천도에 반대하는 반란을 진압한 문벌 귀족들은 그전보다 훨씬 막강한 힘을 지니게 되었고, 그들은 땅을 늘리고 세금을 더 걷기 위해 백성들의 등에 빨대를 꼽아놓고 착취를 하고 있었지만, 그들을 막을 세력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그 탓에 고통을 짊어진 민중에게 무신의 난은 개혁을 이룰 기회였던 것입니다.

 

그러한 시대적인 상황이 병사들이 문벌 귀족을 공격하는 데 적극적으로 앞장을 선 것입니다.

 

이 무렵 고통으로 얼룩진 민중의 목소리를 군인들이 대신 냈다고나 할까요?

결국 무신의 난이라기보다는 모든 고려군인의 난이었던 셈입니다.

 

왕의 주변을 맴돌며 비위를 맞추고 온갖 아첨을 일삼던 그 수많은 신하들이나 환관, 내시들, 변란이 발생한 초기에 그 누구 한사람도 왕을 보호하겠다고 나서거나 왕을 위해서 목숨을 바친 사람이 없었으니 더욱 통탄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정중부. 이의방, 이고 등은 의종을 쫓아내고 의종의 아우인 익양공 호(皓)를 데려다가 왕위에 앉혔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야말로 명목상의 왕에 불과할 뿐 모든 권력은 무신들이 독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바야흐로 백년에 걸친 무신정권이 출발하게 된 것입니다.

무신정권에 비판적인 우간의 김보당이 동계에서 군사를 일으킨 것은 1173년 이었습니다. 그는 정중부 이의방 등을 몰아내고 의종을 다시 세우고자 모의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장순석과 유인준을 시켜 의종을 계림으로 옮겨오게 하고 군사를 일으킵니다. 이에 조정에서는  북계의 군대를 풀어 이를 진압토록 하였는데, 이의민과 박존위가 함께 군대를 이끌고 남으로 내려가 김보당이 이끄는 반군세력을 완전히 진압하여 버립니다. 

 

난을 평정한 이의민은 동년 10월 경신일에 곤원사(坤元寺) 북쪽 연못가에서 의종에게 술을 권하고는 의종을 죽여 버립니다.

 

그것도 산 사람을 잔인하게 등뼈를 꺾어서. 그리고는 왕의 시체를 연못에 던져 버립니다.

 

권좌에서 쫓겨난 임금의 최후는 대개 비참하기 마련이지만, 의종의 죽음은 너무나 끔찍하고 비참하여, 동서고금을 통하여 그 전례를 찾아 볼 수가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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