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왕조실록

고려왕조실록 69 - 명종2

이찬조 2021. 8. 9. 07:02

고려왕조실록 69 - 명종2

* 삼두정치, 이고의 죽음

 

정중부, 이의방, 이고 세 사람은 스스로 신하의 최대 명예인 벽상공신에 오르고, 장군직과 문관 고위직을 겸하여 나라를 다스리게 되니 글자 그대로 “무인천하”가 열린 것입니다.

 

정중부는 황해도 해주 출신으로, 보통 병졸이었다가 군공으로 차차 승진해 대장군(상장군이었다고도 함)까지 되어 있던 정중부는 이때 65세. 이의방, 이고보다는 상당히 연장자였던 것 같으며, 그래서 그런지 두 사람에 비해 신중하고 온건한 편이었습니다. 수박희 현장에서 곧바로 일을 벌이려던 이고를 말린 것도, “문신이란 놈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죽여 버리자.”라는 주장을 억제한 것도 정중부였습니다.

 

그런데 보통 이 정변을 ‘정중부의 난’이라고 부르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이의방과 이고가 주역이고 정중부는 따라가는 입장이었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구체적인 거사를 처음 제의한 사람이 그들이었고, 쿠데타의 주력인 견룡을 이끌던 사람은 이의방이었으며, 정변 후 1년 뒤에는 이의방이 이고를 제거하고 사실상 일인자로 행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는 정중부의 신중함과 온건함이 반영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렇다고 그가 마냥 뒷전에 만족하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우선 이고의 죽음 후 모든 직위에서 물러나겠다고 하고는(그러자 이의방은 정중부의 집에 찾아가 “앞으로 아버지처럼 모시겠다.”라고 해서 은퇴를 철회시켰지만), 아들 정균과 함께 또 다른 거사를 준비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그 역시 권력에 대한 독점욕이 상당했습니다.

 

명종 3년(1173년)에 동북면병마사 김보당이 의종 복위를 내걸고 반란을 일으키고(이 때문에 유배되어 있던 의종은 결국 무신정권에 의해 살해된다.), 다시 이듬해에는 서경에서 서경유수 조위총이 반란을 일으키는 사태가 이어지자 이의방의 리더십에 대한 의심이7 불거지기 시작했고, 더욱이 이의방은 자신을 반대하는 승려들을 학살하고 절들을 불사르는가 하면, 하급 무인들의 처우를 개선하지 않는 등 원성을 많이 샀습니다.

 

한편 무신정변의 핵심 멤버로 정변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이고는 정변 후 대장군 위위경 겸 집주에 임명되었고, 벽상공신이 될 정도로 높은 지위를 차지하였으나 같은 벽상공신들에 비해 자신은 얻은 것이 별로 없다고 생각했던지 정권 독단을 노리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은밀하게 이의방에 대한 거짓 제서(制書, 조서와 같은 말로 임금의 명령을 일반에게 알릴기 위해 만든 문서)를 꾸몄습니다.

 

이를 알아차린 이의방은 이고를 극도로 미워하였습니다. 이에 겁을 먹은 이고는 난을 일으키기로 마음을 먹게 됩니다. 그로부터 며칠후 태자에게 원복(元服, 관례 등에 어른 옷을 입히는 의식)을 가할 때 여정궁에서 열린 잔치에 이고도 참석하게 되었는데 승려들과 불량배들 그리고 몇몇 심복들로 하여금 소매 속에 칼을 품고 있다가 난을 일으키도록 계획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고의 노복이던 교위 김대용의 아들이 이고가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는 사실을 알리자, 김대용은 다시 내시장군 채원과 함께 이의방 앞으로 달려가 모든 사실을 고변해 버립니다. 그렇지 않아도 이고에게 미운 털이 박혀 있던 이의방은 궁문 밖에서 철퇴를 휘둘러 이고를 쳐 죽여 버리고 나서 이고의 식솔들마저도 잔인하게 죽여 바립니다.

 

그런데 오래지 않아 이고를 없애는데 공을 세운 채원 또한 이의방에게 살해되고 맙니다. 전날 이고와 함께 이의방을 비난 한 것이 탄로 난 까닭이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부정한 방법으로 권력을 차지한 자들은 또 다른 권력에 의해 숙정되거나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하게 된다는 교훈이자 사례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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