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왕조실록

고려왕조실록 81 - 신종 4

이찬조 2021. 8. 12. 19:01

고려왕조실록 81 - 신종 4

- 만적의 난

 

 

임금 위에 군림하는 유일한 신하로 국가의 대사를 무엇이든 자기 마음대로 결정 할 수 있게 된 최충헌은 자기 집에서 국가의 중요한 정책을 결정하고 임금에게 보고나 허락도 받지 않고 제멋대로 시행하기 일쑤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인사권을 틀어쥔 채 내키는 대로 대신들을 갈아 치우기도 하였습니다.

 

나라의 정치가 이러하다보니 불만을 품지 않은 자가 드물었고, 중앙에서 지방에 이르기까지 벼슬아치들은 정의라는 것을 완전히 망각하고 자신의 이권에 따라 모든 일을 결정하고 처리하는 등 한마디로 멋대로 그 자체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죽어나는 것은 오로지 백성들 뿐이었습니다.

 

백성들은 살기 위해 곳곳에서 난을 일으켰고 그것은 가뜩이나 어려운 고려의 상황을 더욱 어려운 지경에 빠뜨리게 됩니다.

 

신종 임금 시대에 들어 처음으로 발생한 난은 공교롭게도 최충헌의 가노(家奴)였던 만적이었습니다. 1198년 5월에 사동(私僮 : 私奴) 만적, 미조이(味助伊), 연복(延福), 성복(成福), 소삼(小三), 효삼(孝三) 등 6명이 개경 북산(北山)에서 나무를 하다가 공사(公私) 노비들을 모아 놓고 "우리나라에서는 경인년(1170) 이래 고관대작이 천민 노예에서 많이 났다.

 

장군과 재상이 어찌 씨가 있겠는가. 때가 오면 누구나 할 수 있다. 우리라고 채찍 아래서 뼈 빠지게 일만 하겠는가?"하고 선동했습니다. 많은 노비들이 이를 그럴 듯하게 여기고 종이를 잘라 정(正)자를 새겨 표지로 삼았습니다. 

 

만적의 무리는 날짜를 정해 먼저 최충헌을 죽인 뒤에 각자 자기 주인을 죽이고, 관노들은 궁중에서 처단할 자들을 죽이고, 노비문서를 불태울 것을 기약하게 됩니다. 그러나 약속한 날에 모여 보니 겨우 몇백 명에 불과한지라 다시 보제사에서 모이기로 약속하고 일단 헤어지는데, 한충유(韓忠愈)의 노비 순정(順貞)이 이를 밀고하여 거사가 발각되고 말았습니다.

 

현충유가 최충헌에게 알려 만적 등 100여 명을 죽여 강물에 던졌고, 순정에게는 은 80냥을 상으로 주었습니다. 이는 무신정권하의 혼란 속에서 일어난 천민들의 대표적 저항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고려사회는 엄격한 신분질서가 강조되는 가운데, 특히 노비의 경우는 그 사회적 처지가 가장 열악하였습니다. 그러나 고려 중기 이후 소수의 권신(權臣)들이 권력을 독점하는 현상이 나타나면서 그들에게 기생하는 노비들도 덩달아 지위(?)가 향상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무신란 이후에는 이러한 현상이 더욱 현저해져 천민들의 신분해방운동이 일어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1200년(신종3)에도 진주에서 또다시 공사 노비들의 반란이 일어나 합주(陜州)의 민란에 가세한 일이 있었고,  밀성(密城)에서는 관노 50여 명이 운문(雲門 : 경북 청도)의 민란에 합세하는 등 천민들의 반란이 계속되었습니다. 이러한 천민들의 반란은 당시의 농민반란과 마찬가지로 무인정권의 강경한 진압에 의해 모두 실패는 하게 되지만, 고려 전기의 엄격한 신분사회에서 탈피하는 원동력이 되었다는 점에서 고려사회의 발전에 커다란 소임을 하였던 것으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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