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왕조실록

고려왕조실록(72) 명종 5

이찬조 2021. 9. 14. 08:50
고려왕조실록(72) 명종 5

* 다시 바뀌는 무신정권의 주인.

이의방이 죽고 그 측근 세력들도 거의 정리가 되면서, 이제 모든 권력은 정중부에게로 넘어가게 됩니다. 그는 문하시중이 되어 문관과 무관을 통털어 최고의 지위를 차지하게는 되었으나, 이의방을 죽인 명분을 얻기 위해, 전에 이의방에게 살해된 의종의 국상을 반포하고 의종을 고려 제18대 왕으로 복귀 시킵니다. 이러한 노력으로 고려 정국은 다소 안정을 찾아 가게 됩니다.

정중부, 정균, 송유인 등은 의종이 건설했던 궁궐들을 하나씩 차지하여 자기 집으로 삼는 등 안하무인인 점도 있었으나, 대체로 온건한 정치를 펼쳤으며 왕실이나 문신들과도 화해하려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래서 명종에게도 어느 정도의 권한을 보장해 주었고, 정변 이래 유명무실해져 있던 과거를 제대로 시행하여 한때 무신 일색이던 조정에 다시 문신들이 차츰씩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사실 정중부 시대에는 고위 무신들의 협의기구였던 중방(重房)이 사실상의 최고 권력기관이 되기는 했으나, 그런 가운데도 예전의 관제는 기본적으로 유지가 되고 있었으며, 이의방이나 정중부도 최고 무관으로서가 아니라 문관의 대표로서 권한을 행사했습니다.

​ 일본의 무신정권인 바쿠후의 무사들은 무사들 사이의 주종관계에 따라 쇼군에서 하급 무사까지, 중앙에서 전국까지를 망라하는 철저한 위계조직을 갖고 있었던 반면, 고려의 무신정권은 하급 무인 및 지방과는 별다른 연계가 없었습니다.
말하자면 기존의 체제에서 고위직만을 무신 출신으로 충원한 격이었던 것이지요. 그러한 맹점이 있어 권력행사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에, 왕실 및 문신과 권력을 나눠 갖는 방식은 정권을 오래 유지하기 위해 불가피했던 것입니다.

또한 정중부는 불교계를 건드려 원성을 샀던 이의방과는 달리 승려들을 우대하여 환심을 사려 했습니다. 정중부는 정권을 안정시키려면 다시는 무신들이 딴마음을 품을 수 없도록 문관의 입지를 더욱 늘리고, 지방의 민심을 다독여야 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 그래서 양계(평안도 지역을 북계 또는 서계라고 했으며, 함경도와 강원도 일부지역을 동계라 하여 이 두 지역을 합해 양계라고 했음)의 판관을 종전대로 문신이 맡도록 하고, 무관이면서 실제 직위가 없던 산관들이 문관이 차지하던 하급직을 빼앗으려는 시도를 차단했습니다. 그리고 명종과 의논하여 11명의 찰방사를 11도에 나눠 보내 백성을 착취한 탐관오리를 적발하도록 했습니다. 이때 천 명에 이르는 지방관들이 탄핵을 당하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런 문신 우대와 지방행정 개혁은 무신들의 또 다른 불만과 불안을 불러왔으며, 그리하여 다시 한 번 쿠데타가 일어나고 맙니다.

명종 9년(1179년) 9월, 청년 장교 경대승이 정중부∙ 정균 ∙송유인 등을 암살하고 정권을 잡게 됩니다. 경대승은 집권 직후 찰방사들의 감찰에 부정이 많았다는 이유로 그들이 한 탄핵을 모두 무효로 해 버립니다.
하지만 군부 중에서 정중부를 지지하는 세력의 반발을 겁낸 그는 중방을 무력화하고, 특수 무사집단인 도방(都房)을 만들어 자신을 호위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경대승 역시 결국은 정중부의 문신 우대책을 답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칼을 쥔 무신들에게 권력을 많이 주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지 그 스스로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