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왕조실록 111 - 충혜왕 2
- 반쪽짜리 왕의 등극
“원나라 조정에서 우리 고려에 장차 행성을 설치할 것이라 합니다”라고 김천우가 고합니다. 행성이란 간단히 말해서 식민지를 지배할 때 식민지에 직접 통치기구를 설치하는 것과 같은 일제시대의 총독부와 같은 기구를 고려 조정 내에 설치하여 모든 조정의 업무를 직접 관장 하겠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원나라가 고려로 하여금 일본 정벌을 준비시키기 위해 설치했던 정동행성이 오로지 일본 정벌에 필요한 함선의 제작이나 군량미 조달, 군사의 징벌 등에만 국한하여 직접 관장 하였으나 장차 설치하고자 하는 행성은 고려의 모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직접 원나라가 관장을 하겠다는 의미였습니다.
충혜왕은 원나라 태사 우승상 여첩목아에게 서한을 보내 행성의 설치를 막아달라고 간곡히 부탁을 하니, 연첩목아가 원나라 왕을 구슬려 다행히 행성의 설치는 저지 시킬 수 있게 됩니다. 이 일이 충혜왕이 즉위하고 이룬 유일한 업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한편 고려에 머물던 충숙왕이 원나라로 돌아가기 위해 길을 떠났는데 황주에 이르러 귀국길에 오른 충혜왕 일행과 노상에서 마주치게 됩니다. 충혜왕은 원나라 사람들이 하듯이 호궤(꿇어앉는 법)를 하여 충숙왕을 영접하였는데, 이를 지켜보던 충숙왕이 대노하여 이렇게 꾸짖습니다.
“너희 부모가 모두 고려 사람인데 어찌하여 나에게 호인의 예식을 행하는가? 또 그 의관이 너무 사치스러우니 어찌 사람들을 대하겠는가? 빨리 옷을 바꿔 입으라”
부왕이 훈계하는 태도가 어찌나 엄격하였던지 충혜왕은 울면서 물러나왔다 합니다. 그러나 충혜왕은 고려의 왕으로서 정사를 올바로 이끌어 가기를 바라는 부왕의 질타와 염려를 망각한 채 계속 폐정을 거듭하다가 1332년 2월에 원나라에서 보낸 사신들에게 국왕의 인장을 빼앗기고 맙니다. 아울러 충숙왕이 다시 복위할 것이라는 설명을 듣고는 까물어 칠 정도로 놀라지만, 원나라 사신들은 국사 서류보관 창고를 봉인해버리고 충혜왕을 데리고 원나라로 돌아가 버립니다.
세자시절 원나라로 들어간 충혜왕을 친아들처럼 사랑해 준 이가 있었으니 바로 승상 연첩목아였습니다. 연첩목아는 충숙왕이 왕위에 물러 날 것을 간청하자 원나라 왕에게 적극 고하여 충혜왕이 등극할 수 있도록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당시 태보로 있던 백안 이라는 대신이 연첩목아의 권세를 시기하여 덩달아 충혜왕까지 싸잡아 미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일이 꼬이려고 충혜왕이 폐위되는 시점에 연첩목아가 병사하게 되자 충혜왕은 원나라에서 발붙일 만한 곳이 없게 된 처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상황이 그리되다 보니, 백아의 박대와 냉대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이 되자 충혜왕은 연첩목아의 자제들과 자주 술을 마시며 즐겨 놀았는데 시골 여자 한사람을 사랑하여 간혹 숙위에 결근하곤 하자 백안은 충혜왕을 지목하여 발피(망종이라는 뜻)라고 요하며 원나라 왕에게 그를 고려로 돌려보내도록 고자질 합니다.
원나라 왕이 명하니 충혜왕은 어쩔 수 없이 고려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고려에 돌아와서도 부왕인 충숙왕 역시 그를 발피라고 부르며
가까이 하려 하지를 않았습니다. 그러나 1339년 3월 충숙왕이 죽자 충혜왕이 다시 왕위를 계승받게 되는데, 여기에서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과거 충혜왕이 원나라에서 숙위할 당시에도 충혜왕을 괴롭혔던 원나라 태사 백안이 이번에는 충혜왕의 왕위 계승에 대한 원나라 왕의 승인을 방해하고 나선 것입니다. 게다가 한술을 더 떠서 원나라 왕에게 이렇게까지 고합니다.
“왕도(충혜왕)는 본디 성질이 사납고 인품이 못된데다가 지병까지 있으니 죽어 마땅한 인물입니다. 비록 그가 맏아들이기는 하지만 이번에 또다시 왕의 자리에 오르기에는 부적절한 인물이며 오로지 삼양왕 왕고가 고려의 왕이 될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하니 고려 조정의 백방의 노력도 불구하고 끝내 충혜왕은 원나라의 승인을 받지 못한 반쪽짜리 왕의 신세가 되고 맙니다.
자신의 처지가 그러한데도 불구하고 충혜왕은 왕위 책봉도 받지 못한 상황에서도 주색을 즐기며 부화방탕한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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