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산(091010)
1. 일시 : 2009.10.9~10
2. 장소 : 강화도 마니산
3. 참석 : 서울대학교 대학행정실장 14명
(박철수, 정재현, 김충실, 김영환, 김지홍, 김용무, 문병선, 유덕웅, 유동선, 이기수, 이찬조, 윤원익, 장현성, 한광실)
4. 계획 : 종합체육관 집결(18:00)-강화도 남문식당 만찬(032-937-1199, 전등사 입구)-로얄호텔(032-427-2000)-주제발표(행정실장 역할론, 학내도난 방지대책)
10일 일정은 전등사 관람11명(09:30~10:10)-마니산 산행(10:20~13:10)-동막골 양식장(032-937-7772, 중식은 대하+칼국수) - 광성보 - 서울착(18:00)
그동안 행정실장협의회에서 워크숍은 처음으로 가진다고 한다. 나는 실장들과 만날 때마다 도난문제를 거론하였었다.
이번 계획은 지난 8월 새롭게 전입오신 분들이 있어 환영회 겸 미팅시 논의되어 이러한 계획을 수립시행하게 되었다.
출발시간에 맞춰 참석한 회원은 15인이 참석키로 하였는데 갑자기 농대 이경영 실장님이 못가시게 되었다고 전갈이 와서 14명이 출발하였다. 학교를 빠져나와 한강철교에서 유턴하여 올림픽도로 진입하는데 40분이 소요되었다. 강화도 저녁식사 자리는 20:00에 도착되겠다고 기사님이 안내하여 주신다. 안내를 받고 회장님께서 하나관광 이응진 기사님(010-3946-5627)을 소개하면서 박수로 하답하였다. 시가지를 벗어나 하늘공원 건너편에 오니 차량이 정체를 벗어나 금새 김포에 도달한다. 정상적인 운행으로 19:40분경에 인근에 도착하였으나 남문식당을 찾아가니 20:00이 되었다. 시장하였던 터라 식사를 맛있게 하였다. 저녁식사는 꽃게탕이었다. 요즘에는 숫게가 잡힌다고 한다.
저녁식사를 마치니 21:00 호텔에 돌아와 여장을 푸는데 축구를 같이 볼 분하고 한 방을 쓰기로 하여 문병선 실장님과 함께하였다. 도난에 관한 내용은 식탁에서 토론으로 마무리 지우고 자료는 추후에 배포하였다. 행정실장 역할론은 호텔에서 진행되었다.
마무리 지우고 23:30 우리나라 청소년 축구가 가나와 8강에서 만나 TV를 시청하는데 화질이 좋지 않아 다른 방으로 옮기려 해도 그 방도 똑같다. 4성호텔이 이게 뭔지? 의심스럽다. 외국인이 와서 본다면 뭐라 하겠는가?
결과는 2시20분에 3:2로 졌지만 너무 잘했다고 본다. 만족할만한 경기였다.
수비에 허점으로 졌지만 보완이 필요한 부분을 알았으니......
가나의 20번은 정말 잘하는 선수였다. 수비 4명을 거뜬히 저치고 골인시킨다.
잠이 잘 들지 않아 한참을 뒤척이다가 3시경에나 잠이 든 것 같다.
호텔 주차장에는 초저녁에 승용차가 30대, 대형버스 두 대가 보였는데 아침에 일어나보니 승용은 15대, 대형버스는 4대로 늘어났다. 문실장님은 운동을 나가 한 시간 뒤에 돌아오셨다. 나는 바둑과 아리랑TV를 시청하였다. 8시에 3층에서 식사한다고 문자가 왔다. 식사 후 9시에 출발하려는데 한분이 늦어져서 결국 9:30에 출발하였다.
전등사에 이르니 어린이들이 붓글씨 대회를 준비하고, 그림그리기 대회 등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오늘 대회가 있고, 사찰 안에 우람한 무대가 설치되고 있었으며,
역사의 도시로서 강화가 한몫을 하는 한주간의 시작이었다.
우리 일행은 전등사에 사진으로 흔적을 남기고 잠시 돌아나왔다.
그리고는 곧장 마니산으로 향하였는데 10:20분경 등산을 시작하는데 입장료는 1인당 1100원이다. 많은 인파에 묻혀 오르는데 나이드신 분들이라 젊잖게 갈 줄 알았는데 완전 산악등산대회라도 하는 것 같이 빠르게 올라간다. 1.7키로가 남았을 때 휴식을 취하는데 후미가 오기까지 10여분이상 쉬어야 했다. 나는 일산 마두성당에서 오신 분들에게 먹거리를 제공받아 넉넉하게 먹었다. 메밀전, 떡과 음료 등등, 전도를 한다면서 성당으로 오라고 하신다. 교회로 오시지요. 라고 하였더니, 그러세요? 웃으면서 올라왔다. 그곳에서 정상까지는 문실장님은 30분에 오른다고 하신다. 나도 떨어지지 않고 갔는데 30분정도 소요되었다. 참성단은 보호를 위해 막아두고 있었고, 멀리서 사진으로만 찍을 수 있었다. 엄청 힘들게 올라갔다. 정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직장에서 온 것 같다. 호칭에서 과장님, 실장님 하는 것을 보니.... 우리일행이 올라왔을 때 흔적을 남기고 하산하였는데 정상에서 30분정도 쉰것 같다.
하산코스는 직진으로 내려오니 15년 전에 갔던 코스가 나온다. 돌계단은 깍은 돌계단으로 바뀌었고 거니는 조금 가까웠다. 마니산 높이는 468미터이나 육지의 900미터와 다를 바가 없었다. 아래쪽에 오니 마리산기도원 등 마리산으로 표현한 곳이 몇몇 곳 보인다.
차량에 와서 기사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하루 장거리를 뛸 경우 유류대를 14만원까지 아낄 수가 있다고 한다. 예를 들면 서울 부산을 10키로 이내 95키로로 갈 경우 300리터가 든다고 한다. 그러나 120을 밟으면 420리터가 들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시동을 1시간 걸어 놓으면 13000원이 든다고 한다. 그러면 손님이 타면 시동을 걸면 되지 않느냐고 반문하였더니 여름에는 시원하게 해두고, 겨울에는 따뜻하게 해두어야 하고 커피라도 한잔 마시려면 시동을 걸어 물의 온도가 있어야 함으로 시동을 걸어 둔단다. 우리 모두가 약속시간을 잘 지킴으로 얻는 유익이 많다는 것을 느꼈다.
점심은 동막골양식장이었는데 비닐하우스로 지은 집이었다. 새우 소금구이와 새우칼국수로 맛있게 먹었다.
돌아오는 길에 새우 한 박스와 고구마 한 박스 얻어 왔다. 오는 길에 광성보에 들려 유적지를 탐방하였는데 보란 단어를 새롭게 익혔다. 집에 도착하니 18:20이었다.
광성보는 사적 제227호로 강화해협을 지키는 자연지형이 험한 요새로 강화 12진보(鎭堡)의 하나이다. 고려가 몽골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하여 강화도로 천도 한 후에 돌과 흙을 섞어 해협을 따라 길게 쌓은 성이다.
광성보에서 - 유동선, 문병선, 이찬조임
광성보는 효종 7년(1656)에 설치되었는데 숙종 5년(1679) 돈대를 쌓을 때 광성보에 딸린 돈대로 화도돈, 오두돈, 광성돈이 함께 축조되었다.(보는 3개의 돈대)
영조21년(1745) 성을 석성으로 개축하면서 성문을 건립하였는데, 이를 안해루(按海樓)라 하였다. 조선시대 광해군 때 헐어진 데를 다시 고쳐 쌓았으며, 1658년(효종 9)에 강화유수 서원이 광성보를 설치하였다. 그 후 숙종 때(1679)에 이르러 완전한 석성(石城)으로 축조하였다.
1871년 신미양요 때 가장 치열했던 격전지이다. 그 해 통상을 요구하며 강화해협을 거슬러 올라오는 미국 극동함대를 덕진진 초지진 덕포진 등의 포대에서 일제사격을 가하여 물리쳤다. 그러나 4월 23일 미국 해병대가 초지진에 상륙하고, 24일에는 덕진진을 점령한 뒤, 여세를 몰아 광성보로 쳐들어왔다. 이 전투에서 조선군은 열세한 무기로 분전하다가 포로 되기를 거부, 몇 명의 중상자를 제외하고 전원이 순국하였다.
이 때 어재연장군과 휘하 전 수비군은 용감히 싸우다 장렬히 순국하였는데, 전사한 어재연장군 쌍충비와 200여 명의 순국영령들을 기리기 위한 신미순의총(辛未殉義塚)이 광성보에 있다. 돈대로는 광성돈대와 용두돈대 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