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국지 23 상아
만리장성 축조 당시에 공사가 얼마나 급박하고 가혹했는지, 노역부로 끌려 나간 젊은이들은 열에 일곱은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그러하므로 젊은이들은 목숨을 걸고 부역을 기피하였고, 그에 따라 관헌들의 탄압은 심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시황제는 만리장성 축조 공사에 차질이 생길까 염려 되어 모든 관리들에게,
"만약 노역부의 책임 수량을 차출하지 못하는 지방관은 파면해 버리겠다."
하는 엄명을 미리 내려 두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지방관들의 탄압은 전국적인 현상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나라를 빼앗긴 육국의 백성들은 진시황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판이었는데, 부역 차출이
워낙에 극심하다 보니, 이제는 목숨까지 위태로운 지경이었다.
"제기랄, 그놈은 남의 나라를 힘으로 빼앗아 버리더니 이제는 그것도 부족해서 백성들까지 모조리 죽여 없애려는가 보구나. 이렇듯 이판사판 죽을 판이라면, 우리도 목숨을 걸고 들고 일어나야 하지 않겠나?"
하고 저마다 이를 갈며 시황제에게 항거할 생각을 품게 되었다.
그리하여 시황제를 타도하고 자기 나라를 되찾으려는 저항 의식이 불길처럼 번져 나가고 있었지만,
시황제만은 그러한 현상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러한 이유는 시황제를 둘러싸고 있는 아첨배들이 시황제를 배알할 때마다,
"만백성들은 폐하의 성덕을 입사와 태평성대의 기쁨을 골고루 누리고 있사옵니다."
하는 찬사만 늘어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만리장성 축조 공사가 시간이 지날수록 뜻하지 않은 불상사가 자꾸만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첫째는, 부역으로 끌려 나가면 살아 돌아오는 사람이 거의 없는 관계로 마을마다 청상과부(靑孀寡婦)가 넘쳐나는 현상이었다. 새파랗게 젊은 나이에 생떼같은 남편을 빼앗기고 청상과부가 되었으니,
시황제에 대한 그녀들의 원망은 가히 하늘을 찌를 듯이 높았던 것이었다.
둘째는, 혼인을 해야 할 젊은 남자들이 모조리 노역부로 끌려가는 바람에 처녀들이 신랑감이 없어
시집을 못 가게 된 현상이었다.
시집을 가야 할 나이에 처녀로 늙어 죽게 되었으니 시황제에 대한 그녀들의 원망은 또 얼마나 자자했을 것인가.
그러기에 뜻있는 늙은이들은 하늘을 우러러 이렇게 탄식하였다.
"시황제는 쓸데없는 축성(蓄城) 공사로 국고를(國庫)를 말리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백성까지 멸종을
시켜 버리려는가 보구나. 세상이 이러고서야 천벌이 없을 수 있겠나!"
전국적으로 만리장성 축조가 한창 진행되고 있던 어느 날, 대사(大使: 황제의 비서실장) 조고는 시황제에게 이런 말을 품했다.
"지금 우리나라에는 총각보다 처녀가 훨씬 많다고 하오니 그들 중에서 미인만을 골라 각지에 있는
별궁 시녀(別宮侍女)로 쓰심이 어떠하겠습니까?"
시황제는 불세출의 호색한(好色漢)인지라, <처녀>라는 소리에 귀가 번쩍 뜨였다. 그리하여 미소를
지으며 조고에게 물었다.
"총각보다 처녀가 많은 것은 무슨 까닭인고?"
총각보다 처녀가 많게 된 원인을 조고는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조고가 나랏일을 생각하는 충신이었다면 마땅히,
"젊은 청년들은 모조리 만리장성 축조 공사에 동원된 관계로 처녀들이 신랑감을 구하지 못해 시집을
못 가고 있는 것이옵니다."
하고 사실대로 보고했어야 옳을 일이었다.
그러나 조고는 시황제를 기쁘게 해 주고 싶어서, 얼른 이렇게 대답하였다.
"폐하는 하늘이 내린 어른이신지라, 하늘이 폐하를 위하여 모든 여자들로 하여금 아들보다는 딸을 많이 낳게 해 주신 덕택인 줄 아뢰옵니다."
하고 입에 발린 소리를 히는 것이었다.
시황제는 그 말을 듣고 크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설마 그렇기야 하겠나?"
"아니옵니다. 처녀가 많아진 것은 분명히 폐하를 위한 하늘의 뜻이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어디 있는고?"
그러자 조고는 고개를 간들거리며 이렇게 대답하였다.
"생각해 보시옵소서. 지금 폐하께서는 지방을 순행 하실 때에 거처하시려고 전국 각지에 별궁을 열다섯 개를 지어 놓으셨사옵는데, 그 별궁에는 아직 궁녀들이 갖추어져 있지를 못하옵니다. 하늘은 그 사실을 아시고, 폐하께서 궁녀들을 널리 모아들이게 하려고 처녀들을 많이 낳게 하신 것이오니 이 기회에 각 지방마다 궁녀들을 천 명씩 선발하여 별궁 시녀로 배치해 놓으심이 좋을 줄로 아뢰옵니다."
"음 --- ...., 참으로 기발한 착상이구려."
"폐하는 하늘이 내리신 어른이시므로 마땅히 하늘의 뜻에 쫒으셔야 옳을 줄로 아뢰옵니다."
"하늘의 뜻이 그러하다면 그렇게 하는 수밖에 없겠구먼."
이리하여 조고는, 시황제의 이름으로 전국 각지의 지방관에게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 각 지방관은 12세 이상 18세 미만의 처녀들을 모조리 소집하여 그중에서 미인만을 1천 명씩 선발하여 별궁 시녀로 배치해 놓으라. 모든 비용은 국고에서 지출한다.>
그야말로 상상할 수 없는 생각이었다. 아방궁에만 하여도 궁녀들이 3천 명씩이나 있는데, 1년에 한 번도 들르지 않는 각 지방 별궁에 시녀들을 천 명씩이나 둔다고 하니, 그 한 가지만 보아도 시황제의 가당치 않은 폭정이 얼마나 심하였던지 알 수가 있었다.
그로인해 각 지방 관청에서는 별궁 시녀들을 선발하느라고 야단법석이었고, 처녀가 있는 집에서는
가족들이 서로를 부둥켜안고 울음바다를 이루었다. 시집을 못 보내고 처녀로 죽게 할지언정 황제의
얼굴조차 못 보고 늙어버릴 지도 모르는 시녀로 보내기는 싫었던 것이다.
그 점은 처녀 자신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별궁 시녀가 되기를 자청해 온 처녀가 하나 있었으니, 그 처녀는 제나라 태생인 <상아>라는
열일곱 살의 소녀였다.
옛날 제나라의 영토이었던 평원진(平原津)이라는 곳에도 시황제의 별궁이 있었다.
따라서 평원진 별궁에서도 시녀들을 뽑았는데, 상아라는 처녀는 평원진 별궁의 시녀 선발에 자원을
하고 나왔던 것이다.
모든 처녀들이 한결 같이 별궁 시녀가 되기를 기피해 오고 있었건만 상아만은 무슨 까닭으로 시녀가
되기를 자원하고 나왔던 것일까?
거기에는 아래와 같은 기막힌 사연이 있었다.
평원진이라는 곳은 본디 제수(濟水: 황하)의 강변에 위치한 허허벌판이었다. 그러나 강물이 사시장철 도도히 흘러가고, 들에는 만 가지 기화요초가 언제나 만발해 있는데다가 각종 철새들이 수없이 날아오고 날아가는 철새들의 명소이기도 하였다.
시황제는 지방 순행 중에 우연히 평원진을 지나다가 그곳 경관에 매료되어 평원진에 별궁 하나를 지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허허벌판인 강가에 별궁을 짓는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홍수가 두려워 들판에 그대로 별궁을 지을 수는 없는 일이라서 별궁이 들어 설 자리에다 흙을 열 척(十尺 : 3m) 높이로 쌓아 놓고 그 위에 별궁을 짓자니, 거대한 공사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로 인해 제나라 시절의 백성들은 7만 여명이나 동원되었고 공사 중에 사고로 희생된 사람도 무려 천여 명이 넘었다. 그 희생자 중에는 <나을>이라는 청년도 있었는데, 나을에게는 <상아>라는 열일곱 살의 꽃다운 약혼녀가 있었다.
상아는 본디 제나라의 명의(名醫) 화룡(華龍) 노인의 외동딸로서 얼굴이 아름답기로 소문이 높았지만,
사서삼경(四書三經)에 통달하여 학문이 심오하기로도 널리 알려져 있는 처녀였다. 그녀는 어려서 어머니를 잃고 홀아버지 그늘에서 자랐는데, 상아가 나을이라는 청년과 사랑하는 사이가 되자 아버지는 두 사람을 짝지어 주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혼인식을 곧 올리려고 하는 때에 나을은 평원진 별궁 공사에 노역부로 강제 동원되었다가 아깝게도 흙더미에 깔려 죽어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이렇다 보니 상아는 시집도 못 가 보고 청상과부가 된 셈이었다.
상아는 그로 인해 하루도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고, 화룡 노인도 슬픔이 병이 되어 마침내 병석에
눕고 말았다.
관가에서 화룡 노인에게 <처녀 동원 통고문>이 도착한 것은 공교롭게도 그 무렵의 일이었다.
< 모월 모일 모시에 평원진 별궁에서 시녀를 선발하기로 하였으니 12세 이상 18세 미만의 모든 처녀들은 그날 그 시에 평원진 별궁으로 반드시 출두하라. 만일 관명을 어겼을 때에는 본인은 물론이고, 일가
친척에 이르기까지 참형에 처한다.>
화룡 노인은 이와 같은 무시무시한 통고문을 받아 보고 눈앞이 캄캄해 왔다. 사위 될 청년이 죽어서
사랑하는 딸을 처녀로 늙어 죽게 만든 것도 가슴이 터질 노릇인데 별궁 시녀로까지 뽑아 가겠다고
야단이니, 이 일을 어찌했으면 좋단 말인가.
화룡 노인은 관가에서 보내 온 <통고문>을 받아 놓고 혼자 한숨을 짓다가 어쩔 수 없이 딸에게 통고문을 내보이며 이렇게 말했다.
"관가에서 이런 엄명장이 내려왔는데, 이 일을 어쩌면 좋단 말이냐."
상아는 통고문을 읽어 보고 아무말 없이 오랫동안 깊은 침묵에 잠겨 있었다.
화룡 노인은 가슴이 메어져 와서 마침내 자기가 먼저 입을 열었다.
"관가에서는 너를 처녀인 줄로 알고 이런 통고문을 보내 왔지만, 너는 나을 청년과 약혼을 했던 몸이므로 엄밀히 말하면 처녀가 아니다. 그러므로 너 대신에 내가 관가에 출두하여 모든 것을 사실대로 말해,
시녀 선발에서 제외 되도록 하면 어떻겠느냐?"
화룡 노인으로서는 당연한 이론이었다.
그러나 상아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이렇게 대답을 하는 것이었다.
"그 일에 대해서는 아버님은 염려 마시옵소서. 소녀는 시녀 선발에 자원하여 응할 생각이옵니다."
너무도 뜻밖의 대답에 화룡 노인은 까무러칠 듯이 놀랐다.
"아니, 시녀 선발에 자원을 하겠다니 ....? 지금 네가 제정신이냐!"
상아는 침착하게 대답한다.
"이 문제는 소녀의 관한 일이오니 모든 것은 소녀에게 맡겨 주시기를 바라옵니다."
그 말을 듣자, 화룡 노인은 화가 불같이 치밀어 올랐다.
"너는 <시녀>라는 명칭에 현혹되어 진시황을 측근에 모시는 것을 영광스럽게 여기는지 모르겠다만, 그것은 어림도 없는 소리다. 아무리 철이 없기로 자원하여 시녀 선발에 응하겠다는 것이 말이 되는 소리냐? 나는 너를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는데, 어째서 이 모양이냐!"
화룡 노인은 사랑하는 딸이 <시녀>라는 자리에 눈이 어두워 생각을 잘못하고 있는 줄로 알고 큰소리로 호통을 쳤다. 그리고 연달아 이렇게도 말했다.
"진시황은 천하에 둘도 없는 탕객(蕩客)이어서, 아방궁에만 하더라도 궁녀를 3천 명이나 거느리고 있다. 게다가 이번에는 열다섯 군데의 별궁마다 시녀들을 천 명씩이나 뽑는다고 하니, 네가 설사 평원진
별궁에 시녀로 뽑혀 들어간다 한들, 진시황 얼굴을 구경이나 할 수가 있을 줄 아느냐. 그런데도 자원해서 시녀가 되겠다는 말이냐?"
아버지는 길길이 뛰면서 호통을 쳤지만 상아의 태도는 놀랍도록 침착하기만 하였다.
"아버님께서는 마치 소녀가 허영심에 들떠서 별궁 시녀가 되려고 하는 것으로 알고 계시지만,
소녀는 결코 허영심에서 시녀가 되려는 것은 아니옵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시녀가 되겠다는 것이냐?"
" ...... "
상아는 슬픔에 잠긴 채 언제까지나 대답이 없었다.
그러자 화룡 노인은 딸에게 이런 말을 하였다.
"너의 어머니는 너를 가질 때에 부처님에게 천일기도를 올려서 너를 낳게 되었는데, 너를 밸 때에는
월세계(月世界)에서 선녀(仙女)를 만나는 태몽을 꾼 일이 있었다. 네 이름을 <상아>라고 지은 것도
그 때문이니라. 그런데 달 속에 선녀처럼 거룩하게 살아가야 할 네가 천하의 폭군인 진시황에게 몸을 바치는 시녀가 되겠다고 하니, 이게 어디 있을 수 있는 일이냐? 백년해로를 철석같이 맹세하였던
<나을>이가 죽어서 네가 상심이 크리라는 것은 나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나을>이와의 의리를 생각해서라도 백성들의 증오의 대상이 되어 있는 폭군 진시황에게 몸을 바치는 시녀가 될 수는 없는 일이 아니냐."
상아는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한다.
"저는 나을 낭군에 대한 의리를 저버린 것은 아니옵니다. 오히려 별궁 시녀가 되어 나을 낭군을 죽게 만든 진시황에게 원수를 갚으려 하옵니다."
"죽은 나을의 원수를 갚겠다고 ....? 과연 네가 아니고서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구나. 그러나 진시황은 힘이 장사인데 네가 원수를 갚을 수가 있겠느냐?"
"힘으로 대결 한다면 뜻을 이루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방법을 달리하면 어찌 기회가 없사오리까? 그리고 진시황을 죽여 없앰으로서 만 백성을 폭정에서 구할 수도 있을 것이며, 궁녀라는 이름으로 생지옥에서 허덕이고 있는 수천수만의 처녀들도 해방을 맞을 수가 있을 것이옵니다. 그리하여 진시황을 가까이 만나기 위해서는 부득불 별궁 시녀로 간택 되어야 할 것이옵니다."
"오오 .... 너는 과연 하늘이 내려 주신 사람이로다. 이 애비는 네가 그런 큰 뜻을 품고 있는지도 모르고
너를 허영에 들뜬 아이라고 나무라기만 하였으니, 실로 부끄러운 일이다."
"그런데 소녀는 아버님께 부탁 말씀이 하나 있사옵니다."
"무슨 부탁이냐. 네 부탁이라면 이 애비는 무슨 부탁이라도 들어주겠다."
"진시황에게는 전국 각지에서 선발된 시녀들이 각 별궁에 수 만 명이 있기 때문에 제가 뽑히더라도
진시황을 직접 만날 기회가 있을지는 매우 의심스러운 일이옵니다. 또 천우신조로 진시황을 만날 기회가 오더라도 그를 죽여 없애는 방법만은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는 유혈극(流血劇)은 피하고 싶사옵니다.
"사람을 죽이는데 어찌 피를 흘리지 않을 수가 있겠느냐."
"아버님께서는 천하의 명의이신만큼, 피 한 방울 흘리게 하지 않고도 사람을 자연스럽게 죽일 수 있는
비방약(秘方藥)을 가지고 계신 줄로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님께서는 소녀를 위해 그와 같은 비방약을
한 사람 분만 지어 주시옵소서."
"뭐야 ? 이 애비더러 사람 죽이는 약을 지어 달라는 말이냐?"
화룡 노인은 펄쩍 뛸 듯이 놀라더니 대번에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그것만은 안 된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안 된다."
하고 완강히 거절하는 것이 아닌가.
"제가 부탁하더라도 안 되겠다는 말씀입니까?"
"누가 부탁을 하더라도 그것만은 안 된다. 지난날 이 애비를 가르친 선생님께서는 나에게 그 약방문(藥方文)을 전수(傳授)해 주실 때에 <이 방문은 알고만 있을 뿐이지 어떤 경우에도 사용해서는 안 된다. 의자(醫者)는 인술(人術)인 까닭에, 사람을 죽이는 약을 단 한 번이라도 쓰게 되면 그 사람은 의자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고 말씀 하시면서, 누구한테라도 그런 약을 지어 주어서는 안 된다고 신신 당부를 하셨다. 그런데 진시황이 아무리 밉기로 의자인 내가 어찌 사람을 죽이는 약을 지어줄 수가 있겠느냐. 비록 너의 부탁이라 하여도 그것만은 안 되겠으니 그리 알아라."
명의인 화룡 노인으로서는 너무도 당연한 거절이었다.
상아는 아버지의 말씀을 이해 할 수 있었다. 의사란 죽어 가는 사람을 살려내는 것이 본업이지 살아 있는 사람을 죽이는 직업은 아니다. 상대자가 비록 원수일 경우에도 마찬가지니, 인술(人術)이란 말이
이래서 생겨난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게 따지고 보면, 명의인 아버지가 사람 죽이는 약을 못 지어 주겠다고 단호하게 거절하는 심정을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러나 상대방이 만백성을 도탄에 몰아넣은 폭군(暴君)에다, 전후(前後)의 살핌 없이 무고한 백성까지 한꺼번에 몰아서 처단하는 살인광(殺人狂)일 경우에는 문제는 근본적으로 달라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상아는 아버지를 이렇게 설득하였다.
"사람을 죽이는 약만은 지어 주지 못하시겠다는 아버님의 말씀은 잘 알아듣겠습니다. 아버님으로서는
당연하신 말씀이라는 것도 알고 있사옵니다. 그러나 진시황이란 인물을 살려 둠으로써 수많은 백성들이 지난 몇 해 동안 겪어 온 것과 같은 고통에 계속하여 시달리게 하는 것과 그를 없앰으로써 억조창생을 지옥 속에서 구출해 내는 것과, 과연 어느 편이 인술에 가깝다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아버님께서는 조그만 인술만 생각지 마시옵고, 보다 더 큰 참다운 인술을 생각해 보아 주시옵소서."
"의사에게는 오직 인술만이 있을 뿐이다. 인술에 어찌 대소(大小)의 구분이 있을 것이냐."
"그렇다면 아버님께 한 말씀만 더 물어 보겠습니다. 제가 도탄 속에서 허덕이고 있는 백성들을 구출하기 위해 진시황을 죽이려는 계획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생각이라는 말씀이시옵니까?"
상아가 야무지게 따지고 들자, 화룡 노인은 무척 괴로운 듯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싼 채 대답을 못 한다.
두 사람 사이에는 오랫동안 침묵이 흘렀다.
마침내 화룡 노인은 굳은 결심이라도 한 듯 입술을 꽉 깨물며 말했다.
"네 소원이 그토록 지극하다면 네가 원하는 비방약을 지어 주겠다. 그 대신 이 애비는 의사로써는
이미 죽어 버린 사람이나 다름이 없게 되었으니 오늘로서 의업(醫業)은 폐업하기로 하겠다."
그리고 즉석에서 가루약 한 봉지를 딸에게 지어 주면서 말했다.
"이 약을 음식물에 타서 세 번에 나누어 먹이면 그 사람은 그날부터 시름시름 앓기 시작하여 한 달안에
반드시 죽게 되리라."
"아버님! 고맙습니다. 진시황 한 사람을 죽임으로써 다시는 저와 같은 사람도 없으려니와 억조창생을 도탄 속에서 구출할 수 있다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이 되겠사옵니까 "
상아는 아버지를 부둥켜안으며 크게 기뻐했지만, 정작 화룡 노인은 말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그로부터 며칠 후, 상아는 별궁 시녀로 선발되어 평원진 별궁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상아가 별궁 시녀로 뽑혀 들어간 바로 그날 밤, 명의 화룡 노인은 독약을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의사로서 사약을 지어 준 죄책감에 못 이겨 스스로 죽음의 길을 택했던 것이다.
그러나 상아에게 과연 진시황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올지, 안 올지는, 그 어느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출처] 열국지(熱國誌) (23) <상아>|작성자 소주병
'열국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열국지(熱國誌) (25) 반동(反動)의 태동(胎動) (0) | 2020.01.08 |
---|---|
열국지 24 분서갱유(焚書坑儒: 책을 불태우고 선비를 파묻고) (0) | 2020.01.07 |
열국지 22 진 멸망의 전조, 만리장성 축조 (0) | 2020.01.06 |
열국지 21 해동국 장생불로초 (0) | 2020.01.03 |
열국지 20 시황제 시대를 열다. (0) | 2020.01.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