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75)> 선조 23 - 명량해전(2)

이찬조 2021. 4. 20. 21:53

<조선왕조실록(75)> 선조 23 - 명량해전(2)

이순신의 판옥선은 한 척이 더해져 13척, 백성들의 어선 100여 척을 전선으로 위장해 후미에 배치하였습니다.

왜군 함대는 물살이 순방향인 때를 선택해 급격한 조류를 타고 울둘목을 일거에 통과해 벽파진에 진을 친 조선 수군을 박살내고자 했습니다.

또한 설령 울둘목을 조선군이 막아선다 해도 빠른 조류를 타고 대규모 선단이 진격한다면 몇 척 안 되는 조선 수군이 견딜 수 없을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함선이 많아도 해협이 좁아 한꺼번에 나아갈 수 있는 수는 제한될 수밖에 없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순신이 명량해협을 전장으로 선택한 첫 번째 이유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왜선 함대의 규모에 겁을 먹고 뒤로 빠지려는 휘하 장수들이었습니다.

이순신은 초요기(招搖旗 - 군사가 전진하거나 행진할 때에 대장이 장수들을 부르고 지휘하던 깃발)를 올려 장수를 부르고는 다음과 같이 독전하였습니다.

- 군법에 죽고 싶은가, 도망가서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울둘목에서는 적이 아무리 많아도 소용이 없으니 이곳만 죽기로 봉쇄한다면 승산이 우리에게 있다. 나와 함께 싸워 한 번이라도 패한 적이 있더냐

조선 함대는 역방향의 물살에도 견딜 수 있도록 배를 횡으로 세우고 특수 제작한 닻을 내려 물살을 버티어 냈습니다.

드디어 어란진에서 출발한 133여 척의 왜군 함대가 강한 순조의 물살을 타고 10-15대씩 대열을 이루어 울둘목을 최대한 빠르게 통과하기 위해 명량해협에 들어섰습니다.

그런데 조선 판옥선이 역방향의 물살을 당당히 견디며 배를 고정시킨 채 우뚝 서 포격을 가하자 왜군은 몹시 당황하기 시작했습니다.

좁은 해협에 줄줄이 들어선 일본 함대는 조선 수군의 좋은 표적이 되고 말았습니다.

조선 수군이 왜선 선두를 함포로 두들기자 후미의 왜선이 순차적으로 추돌하였고, 이로 인해 왜선의 진영은 급격히 허물어졌습니다.

급한 순조(조수의 흐름)를 타고 빠르게 전진하려던 계획이 오히려 급한 순조로 인해 모두 무위로 돌아가게 된 것입니다.

조선 수군이 울둘목을 가로막고 버티며 선두의 배를 집중 타격하는 방식으로 왜선과 대치하는 사이, 드디어 조류의 흐름이 왜군 쪽으로 바뀌었습니다.

왜군은 조류의 흐름이 바뀔 때까지 이곳에 발이 묶여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순신이 명랑해협을 전장으로 선택한 두 번째 이유입니다.

비록 규모는 상대가 되지 않았으나, 가능한 모든 역량을 총 동원한 함포 사격에 빠른 조류와 강한 판옥선을 이용한 충돌 공격, 숨 돌릴 새 없이 몰아치는 자신감에 찬 거친 공격에 일본 수군은 견딜 재간이 없었고, 마침내 왜군은 후퇴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명량해전에서 왜선 130여 척 중 30여 척이 격침되었고, 60여척이 쓸 수 없을 정도로 파손되었으며, 최소 1,800명의 왜군이 죽었고, 조선의 전선은 하나도 격침되지 않았으며 100여 명의 전사자가 발생했으니, 실로 세계에 유례가 없는 해전이었습니다.(이순신은 난중일기에서 이 명랑해전을 치른 후 “참으로 천행이었다”고 수 차례 적고 있습니다)

명량해전으로 인해 일본군의 수륙병진작전이 모조리 무산되었고, 일본군은 남해안 일대에 분산되어 왜성을 쌓고 농성전에 들어가게 되었으니, 이로써 정유재란을 일으킨 일본은 계속 전쟁을 수행할 동력을 잃게 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