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77)> 광해 1 - 광해의 恨(1)
광해군은 후궁 공빈 김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첫째는 임해군) 공빈은 아들 둘이 서너 살일 때 세상을 떴고, 왕실에는 달리 적자가 없었습니다. 광해는 비록 서자이나 형인 임해군과 달리 어려서부터 영민하고 도량이 넓어 일찍이 왕재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왜란이 발발하자 도성을 버리고 도망친 선조는 부랴부랴 광해를 세자로 삼고, 곧 다음과 같은 명을 내렸습니다.
- 나는 의주로 가 명에 원병을 청할 것이니, 세자는 남아 군무를 담당하라.
광해는 분조( 임진왜란 때 임시로 세운 작은 조정, 선조는 지는 신의주로 토끼면서도 원조라고 칭함. 병신 육갑을.떨어요)를 이끌고 사실상 적지나 다름없는 요소요소를 풍찬노숙하며 내달았습니다.
세자인 광해가 솔선하여 항전을 독려하고 백성을 위무하자 흩어졌던 민심이 다시 모이고 도망쳤던 사대부와 조정 중신들이 모여 들었습니다.
18세에 불과한 광해가 평양성 탈환 시까지 사실상의 조정인 분조를 이끌며 훌륭히 임금의 역할을 해낸 것입니다.
명나라도 광해의 이러한 활약을 인정했고, 급기야 명나라 장수 송경락은 "영웅의 풍채에 위인의 기상이 드러났다"는 내용의 자문을 조선에 보내기에 이르렀습니다.
선조가 의주에서 요동만 바라보고 있을 즈음, 광해의 활약 소식을 들은 젊은 신하들은 노골적으로 "군국의 기무를 모두 세자 저하께 맡겨 처리하심이 옳은 줄 아옵니다"라는 상소를 올리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임금 자리를 지키기 위해 선조가 생각해 낸 꼼수가 바로 선위 파동입니다.
선조가 왜란 동안 선위 파동을 일으킨 것은 실록에 나오는 공식적인 것만 해도 19회입니다. 뉘미~선조 임마~이게 진짜 이 나라의 임금이가~ 마~~그냥~콱~
에휴~어쨌든~이순신 장군께서 졸라 싸울실때, 조정의 신하들은 선조의 선위 파동이 있을 때마다 선조임금에게 죽기 살기로 이를 말려야 했고, (전하~통촉하여 주시옵소~뭐 이런거였겠지요)
세자인 광해는 며칠씩 끼니까지 굶어가며 차가운 뜰 앞에 꿇어 앉아 명을 거두어 달라는 읍소를 하여야 했으니, 전쟁 통에 국력 낭비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선조는 이런 방법을 통해 흔들리는 권력을 움켜잡았지만, 떨어진 위신까지 회복할 수는 없었습니다.
선조는 도망 다니며 제 한 몸 건사하기 바빴던 자신의 모습을 돌이켜 볼 때마다 어린 나이에 위풍당당하게 나라의 구심역할을 한 광해에게, 이순신에게 느껴야 했던 열등감을 또 다시 느껴야만 했습니다.
선조의 이러한 질투와 열등감은 미움으로 변해갔고, 이는 결국 광해의 운명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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