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160)> 고종 18 - 갑신정변(1)

이찬조 2021. 5. 30. 22:09

<조선왕조실록(160)> 고종 18 - 갑신정변(1)

 

임오군란을 빌미로 출병한 중국군대는 대원군을 중국으로 압송해 가는 한편, 서울에 진주해 있으면서 조선을 다스리는 총독부의 역할을 자임하였습니다.

 

치안을 맡고, 여러 조약을 통해 불평등한 관계를 더욱 강화시켜, 과거 사대관계를 넘어 조선을 식민지로 대우하려 들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고종은 임오군란의 충격에서 벗어나 백성들에게 사과문을 내고, 곧이어 외국과의 교류와 개화가 불가피함을 설명하는 윤음(조선시대 국왕이 국민에게 내리는 훈유의 문서)을 내렸습니다.

 

- 살기 위해서는 불가피하다!

 

고종의 이러한 조치에 위정척사를 주장하는 소가 있기는 했지만 미미했고, 고종은 들어줄 생각이 없었습니다.

 

고종은 개화정책을 이끌 기구로 통리군국사무아문을 설치하고 리홍장이 추천한 뮐렌도르프를 협판교섭통상사무로 임명하는 등 외국인을 여럿 고용하였습니다.

 

또한 중국에 군사훈련을 요청하는가 하면 (교관 원세개), 흑단령을 선포해 관복을 간소화하고, 유생들의 강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사복마저 간소화하도록 하였습니다.

 

- 사대부에게 이런 옷을 입으라 한다는 것이냐...

 

또 일본을 본 따 한성에 순경부를 설치하고, 박문국을 설치하여 최초의 신문인 한성순보를 발간하였으며, 1883년 1월에는 태극기를 만들어 국기로 선포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조선은 모처럼 국왕과 조정이 하나가 되어 국가를 정비하고 국력을 신장시키는 길로 나가는 듯 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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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지옥의 문턱에서 돌아온 중전은 중전 국상에 참여한 대원군의 측근과 임오군란의 주역들을 잡아들여 효수한 후 생각했습니다.

 

- 그래 이 난세에 역시 믿을 데는 역시 우리 민씨 밖에 없다!

 

이에 따라 민태호, 민명익 등 민씨 척족들이 대거 중용되었고, 특히 스물을 갓 넘긴 민영익이 조정 실세로 주목을 받았습니다.

 

민영익은 중전의 오라비인 민승호의 양자가 된데다 개화에 대한 식견이 깊어 중전의 각별한 총애를 받았습니다.

 

그는 박영효, 김옥균 등과 수신사로 일본에 다녀왔고, 홍영식, 서광범 등과 보빙사로 미국에 가 미국 대통령을 만나고 오기도 하였습니다.

 

중전과 민씨 세력은 자연스레 친청파를 형성했습니다.

 

- 나를 컴백시겨 준 고마운 나라!

 

이들 친청파는 리홍장과 교감하며 중국식 개화의 길을 택했습니다.

 

- 우리의 전통과 사상은 지키면서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이는 동도서기!

 

그러나, 이들의 개화방식에 근본적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 세력이 있었으니, 이들의 생각은 이러했습니다.

 

- 그게 무슨 개혁? 개혁 코스프레지.

- 무엇보다 그들은 사대당, 중국의 내정간섭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무슨 개화, 개혁이란 말인가!

 

조선정국은 온건개화파와 급진개화파의 대립 속에 또 다시 폭발 일보직전으로 치닫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