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179)> 망국 16 - 명성황후 시해(4)

이찬조 2021. 6. 19. 13:06
<조선왕조실록(179)> 망국 16 - 명성황후 시해(4)

갑작스런 상황 앞에 고종은 몹시 당황하였습니다. 일본군이 경복궁을 포위하자 외국 공사관에 구호를 요청하기도 하였으나 무의미했습니다.

고종은 낭인들의 주의를 돌려 명성황후를 보호하고자 밀실의 뒷문을 모두 열고 방 문 앞으로 직접 나섰는데, 낭인들은 칼을 휘두르며 한 나라의 임금인 고종의 어깨와 팔을 끌고 다니기도 했고, 무단 침입을 꾸짖는 고종의 어깨에 손을 얹어 주저앉히기까지 했습니다.

또한 태자도 다른 방에서 붙잡혀 머리채를 휘둘리고 관이 벗겨지고 칼등으로 목 줄기를 얻어맞는 수모를 당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날 오전 9시 20분, 주한 일본 공사관에서는 본국 육군참모부에 전문 한 장을 보냈는데, ‘극비’라는 붉은 낙인이 찍힌 이 전문에는 ‘국왕무사 왕비살해’라는 문구가 짤막하게 적혀 있었습니다.

조선 심장을 무참히 유린한 미우라는 유길준 등으로 구성된 친일 내각을 구성하고, 각국에 황후 시해는 일본과 상관이 없는 일이라고 강변하였습니다.

- 왕비의 정적인 대원군과 훈련대 해산령에 분개한 군인들이 합작해 벌인 듯 하오!

그러나 이 일의 전모가 점차 드러나 국제 문제로 비화되기 시작하자, 일본은 미우라를 소환해 재판에 회부하였습니다.

일본 재판부는 미우라 개인이 훈련대 해산에 불만을 품고 대원군의 요청을 받아들여 낭인을 동원해 저지른 일이라는 판결을 하였습니다.

- 무식한 무장이 욱해서 벌인 일이다!

그러나 그 이후 미우라가 승승장구하였음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이 모든 과정은 황후 시해 사건이 일본 정부가 기획한 일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이 일은 불과 110년 전 일입니다.

일본의 황후 시해 이후 고종은 허수아비가 되고 말았습니다. 고종은 황후를 폐서인 조치하였다가, 황태자의 간청에 빈으로 강등시켰습니다.

곧 일본에 의해 구성된 친일 내각(김홍집, 유길준, 박영효 등)이 권력을 잡았고, 이들은 태양력 사용, 단발령 등의 서구화 조치를 취했습니다.

고종이 시범이 되어 머리카락를 잘랐고, 세자 역시 유길준이 직접 머리카락에 칼을 대었습니다.

이후 단발령은 강력하게 실시되어 길거리 곳곳에서 상투가 잘려나갔습니다. 유림 등 조선 백성이 크게 반발한 것은 당시 사정상 당연했습니다.

- 오 드디어 조선이 금수의 나라가 되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