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왕조실록 129

고려왕조실록 9 ㅡ 태조 8

* 우리는 하나 그리고 귀순정책 재위 이듬해 태조는 송악 남쪽에 수도를 정하고 궁궐을 신축하여 나라의 기틀을 잡아가기 시작합니다. 즉위 3년째로 접어드는 920년 정월에는 신라가 사신을 보내와 신라와의 교류가 시작되고, 이어서 9월에는 후백제의 견훤도 아찬 공달을 사절로 보내면서 지리산의 대나무와 공작의 깃털로 만든 화살을 선물하는 등 삼국의 교류가 시작됩니다. ※ 아찬 벼슬 - 신라의 관직제로서 17등급 중 6등급에 해당하는 계급, 성골과 진골만이 5등급까지 오를 수 있었고, 개국시 참여한 족장이나 호족장은 6두품으로 아찬 벼슬이 종착지였음. ※ 성골 - 진골 - 6두품 - 5두품 - 3두품(평민) 민심과 국내 정치가 어느 정도 안정을 찾고, 위협적이었던 궁예의 잔존 세력도 정리가 되었으나 지방 호족들..

고려왕조실록 2021.07.10

고려왕조 실록 8 - 태조 7

* 건국과 혼란의 수습 폭군의 악정을 뿌리치고 새 임금을 맞이하였으나 후고구려의 상황은 개탄을 금지 못할 정도로 피폐한 상태였습니다. 위압과 모멸, 혹독한 폭력으로 백성과 신하들을 다스린 궁예에 의해 국토는 황폐해졌고, 백성들은 도망쳐 인구는 줄어들었으며, 어디를 가든 고통의 신음소리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백성들의 뜻은 수십 갈래로 갈라져 중심을 잃은 지 오래이고, 중앙정부의 통제가 먹히질 않으니 지방호족들을 중심으로 독자적인 생활권을 형성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이다 보니, 비록 왕위에 오르긴 하였으나 태조 왕건의 입지는 그리 튼튼하지 못하였습니다. 게다가 밖으로는 강성한 견훤의 후백제와 쇠망하여 가기는 하지만 오랜 역사의 신라가 버티고 있지 않은가. 이러한 상황에서 민족의 통일도 고도의 ..

고려왕조실록 2021.07.09

고려왕조실록 7 - 태조 6

*궁예의 몰락 고려 건국의 문이 열리다... 앞에서 최웅을 언급하다보니 왕건이 왕위에 오른 다음의 스토리가 잠깐 나왔습니다. 다시 역사의 바퀴를 되돌려 궁예의 몰락으로 되돌아 가겠습니다. 918년 6월 을묘에 기병장군 홍유, 백현경, 신숭겸, 복지겸 등이 비밀회합을 갖고 왕건의 자택을 방문하였습니다. 먼저 홍유가 왕건 앞으로 나아가 큰절을 하며 “삼한이 분열되고 뭇 도적이 봉기하였을 때 지금의 임금이 분발하고 크게 호통 침으로서 도적들을 쳐 없애고 나라를 건설한지도 벌써 2기가 넘습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끝을 잘 맺지도 못하고 포악한 행위가 태심하여 처자를 살육하고 관리들을 죽여 없애니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 임금을 원수같이 여기게 되었습니다. 대저 폭군을 폐위하고 현명한 사람을 세우는 것은 천하의 ..

고려왕조실록 2021.07.09

고려왕조 실록 6 - 태조 5

* 왕건을 구한 최웅 그날 기지를 발휘하여 왕건을 구한 최웅은 898년 황주 태산에서 태어났습니다. 최웅의 어머니가 그를 임신하였을 때 집 앞에는 오이가 열렸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꿈에 홀연 오이 넝쿨에서 참외가 탐스럽게 열렸습니다. 그녀는 이 신기한 꿈 이야기를 전해들은 궁예는 “사내아이를 낳으면 나라에 이롭지 못할 것이니 절대로 키우지 말라” 궁예가 점을 쳐보고 나서 이렇게 명하였습니다. 그러나 최웅의 부모는 몰래 숨겨두고 그를 양육하였습니다. 총명한 최웅은 5경을 통달하고 글을 잘 지었으므로 궁예의 한림당이 되었으며 제고(왕의 명령서)를 기초할 때마다 궁예를 흡족하게 하였습니다. “소위 성인이란 사람이 이런 자가 아니겠는가” 이렇게까지 칭찬을 한 적도 있었습니다. 최웅은 궁예가 왕위에 있을 때보다..

고려왕조실록 2021.07.08

고려왕조 실록 5 - 태조 4

* 위기에 빠진 왕건 왕건은 나주와 목포를 안정시키고 나서 내키지는 않지만 궁에 돌아가 해상의 이익과 임기 응변할 군사 대책들을 보고하였습니다. 이에 궁예는 여러 대신들 앞에서 “나의 장수들 중에서 누가 이 사람과 비할 자가 있으랴” 하고 왕건을 진심으로 칭찬하였습니다. 그 시절 궁에서는 반역이라는 죄명으로 하루에도 적게는 십여 명씩 반역 죄인의 가족과 9족까지 멸할 때는 심지어 백여 명이 죽어나가고 있었습니다. 영토가 넓어지고 왕국의 체제가 정비되어 갈수록 궁예는 불안을 느끼고 있었던 것입니다. 누군가 자신의 지위를 노리고 반역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초조를 이기지 못하고 무고한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었던 것입니다. “나는 미륵관심법을 체득하여 부녀자들의 음행까지도 알아낼 수 있다.” 궁예는 늘 이..

고려왕조실록 2021.07.08

고려왕조실록 4 - 태조 3

* 포악해진 궁예, 망조의 길로 들어서다.... 왕건은 상주 사화진에서 견훤의 군대와 여러차례의 싸움에서 승리하여 궁예의 영토는 더욱 넓어졌고 군대도 한층 강력해지자 궁예는 신라를 흡수할 뜻을 품게 됩니다. 그는 신라를 멸도(滅都)라 불렀으며, 항복해 오는 자들을 모조리 죽여 버리고, 듣기 싫은 충언을 하거나 자신의 비위에 맞지 않은 신료들을 억지 논리로 처단하는 등 만행을 보이기 시작하였습니다. 궁예의 만행이 심해지자 왕건 역시 궁예에게 두려움을 느끼고 중앙 정치 무대를 떠나 지방 근무를 자청하여 변방으로만 나돌게 됩니다. 한편 왕건과 견훤은 여러차례 전투를 벌이게 되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전투가 덕진포해전입니다. 견훤은 모든 함선을 총 동원하여 자신이 직접 선두에 서서 목포에서 덕진포항(지금의..

고려왕조실록 2021.07.08

고려왕조실록 3 - 태조 2

*궁예 오른팔을 얻고 왕건은 승승장구.... 후고구려의 건국자 궁예의 성은 김 씨입니다. 아버지는 신라 제47대 헌안왕이고 어머니는 궁녀이었다고 합니다. 궁예는 태어나자 이빨에 이상한 빛이나 장차 해로운 인물이 될 것이라는 의심을 받았는데 이를 믿은 왕이 죽일 것을 명하였습니다. 궁예는 외가에서 출생 하였는데 사자들이 달려가 강보에 싸인 아기를 다락 밑으로 던져버렸는데 이를 유모가 받아내어 죽지 않았다고 합니다. 궁예가 애꾸눈이 된 것은 유모가 궁예를 받아낼 때 손가락으로 눈을 잘못 건드린 것 때문이라고 합니다. 왕족으로 태어났으나 신분없는 신세의 궁예는 ‘세달사’라는 절에 몸을 의탁하여중이 되어 승려 생활을 하게 됩니다. 이 시기는 신라의 국운이 다하여 곳곳에 반란과 도적들이 횡횡하고 이들 가운데 두각..

고려왕조실록 2021.07.08

고려왕조실록 2-태조 1

* 영웅의 탄생, 왕건 성주가 되다. 877년 정유년 정월 병술일 하늘에서 송악의 금성태수 집안에 신비한 광채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이 상서로운 빛은 온 종일 계속하여 집안을 휘감고 있었는데, 그날 저녁 바로 시대의 영웅 왕건이 태어나고 있었습니다. 때는 바야흐로 천년왕국 신라의 국운이 서산에 걸린 저녁 해처럼 쓸쓸히 기울어가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전국 각지에서는 반란군이 일어나고 중앙정부는 이를 제압할 힘은 없고 그야말로 무법천지가 되어가고 있던 시절이었습니다. 이 무법천지의 여러 반란군의 괴수들 중에서도 눈에 띄는 수뇌가 있었는데, 그들이 바로 견훤과 궁예였습니다. 남쪽 땅에 웅거하며 후백제를 일으킨 견훤, 철원에 도읍을 정하고 고구려의 땅에 웅거한 태봉의 궁예, 이들은 천년왕국 신라의 경순왕과 함께..

고려왕조실록 2021.07.08

고려왕조실록 1

* 고려왕조계보 조선왕조실록은 원본이 보존되어 있어 그 진위에 시비가 별로 없는 편입니다. 단지 영화나 TV 드라마를 제작하면서 시청자들의 흥미를 유발하기위해 야사나 남녀의 애정관계 등 허구의 내용들을 삽입하여 과장되거나 잘못 알고 있는 내용도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역사적 사건 자체의 내용들은 사실과 거의 부합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에 비해 고려실록은 임진왜란 당시에 모두 불 타 없어져버렸고, 현존하는 고려왕조실록은 조선 초기에 세종의 교지를 받은 김종서, 정인지 등에 의해 편찬된 “고려사”와 이 고려사를 기본으로 하여 발간된 “고려사절요”에 의거하여 저술되었는데, 이들은 고려를 뒤엎고 권력을 쟁취한 승자들에 의해 편찬된 것이므로, 아무래도 당사자나 그들의 조상에 관한 부분은 사실을 왜곡시켰거나 미화..

고려왕조실록 2021.07.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