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왕조실록 129

고려왕조실록 19 ㅡ 정종 1

고려왕조실록(19) 정종 1 * 왕위에는 올랐으나... 945년 9월 신명순성왕태후 유씨 소생의 왕자 요가 23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습니다. 지방호족들을 떠안은 채 수립된 통일왕국 고려의 태생적 한계를 어찌하지 못하고 태조는 29명의 왕비를 맞이하여 25명의 왕자를 갖게 되었습니다. 태조의 이러한 처세 때문에 그 후손들은 피를 부르는 왕권 쟁탈전을 벌여야만 하였고, 본인 스스로는 왕위에 관심이 없었더라도 왕자들은 외가의 기대와 강력한 압박 때문에 어쩔 수없이 왕권 쟁탈전에 뛰어 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앞에서는 왕자 요와 소가 왕권에 도전하는 내용만 기술하였으나 그 외에도 여러 왕자들이 왕권을 넘보다가 죽는 사건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다지 주목할 만한 내용들이 아니므로 생략합니다. 아무튼 정..

고려왕조실록 2021.07.16

고려왕조실록 18 - 혜종4

고려왕조실록 18 - 혜종 4 *임금은 날개를 잃고 왕자들은 권력을 탈취하다. 당시 혜종의 권력 기반은 오로지 박술희와 왕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왕규가 혜종을 시해하려 했음이 밝혀지면서 박술희와 왕규는 서로 적으로 변하고 맙니다 신변의 위협을 느껴 날마다 처소를 옮겨 다니다시피 했던 혜종과 마찬가지로 박술희도 아군에서 적군으로 변한 왕규와, 호시탐탐 지존의 자리를 엿보고 있는 왕자 요와 소, 이들 때문에 박술희도 항상 100여명의 호위무사들을 대동하고 다녔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자신의 안전에 치명적인 악재로 작용하리라는 것을 본인은 정작 몰랐던 것입니다. 이제나 저제나 기회를 엿보던 왕자 요가 박술희에게 반역의 뜻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덮어씌운 것입니다. 지엄한 궁궐 내에서조차 100..

고려왕조실록 2021.07.14

고려왕조실록 17 - 혜종 3

고려왕조실록(17) 혜종 3 *임금의 암살기도, 혜종을 구한 최지몽 달마저 숨을 멈춘 깊은 밤이었습니다. 검은 옷을 입은 자객이 혜종의 처소에 이르러 주위를 살피다가 방안으로 스며들었습니다. 자객이 혜종의 잠자리 앞에서 칼을 움켜쥐려 할 때였습니다. 깊이 잠이 든 줄만 알았던 혜종이 솟구쳐 몸을 일으키더니 단단한 주먹으로 자객의 인중을 강타하였습니다. “헉” 숨이 끊어지듯 자객은 단발마의 소리를 지르며 나가 고꾸라졌습니다. 내시들에게 끌려가는 자객을 보면서 혜종은 한동안 상심한 표정을 지우지 못하고 그 자리에 굳은 체 서있었습니다. 혜종은 어릴 때부터 태조를 따라 전쟁터를 따라다니면서 야지에서 잔뼈가 굵은 터인지라 기골이 장대하고 체격이 건장하여 스스로 자객을 물리 칠 수는 있었지만, 떠받쳐 주는 배경이..

고려왕조실록 2021.07.14

고려왕조실록 16 - 혜종 2

고려왕조실록 16 - 혜종 2 *왕규는 충신인가 역적인가 왕규는 태조의 임종을 지킨 대신들 중의 한사람으로 태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던 인물입니다. 그는 경기도 광주를 근거지로 하는 강력한 호족이었으며 태조에게 제15비 제16비로 연달아 두 딸을 시집보낸 외척 세력이기도 합니다. 이를 보더라도 그를 태조가 얼마나 신임하였는지, 또 왕규가 갖춘 세력이 얼마나 강대하였는지 짐작을 할 수가 있습니다. 태조에게 두 딸을 바친데 이어, 태자인 무에게도 딸을 시집보내 태조의 장인이자 혜종의 장인이기도한 왕규는 박술희와 함께 태조의 유명을 지켜 가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충주 유씨의 세력을 등에 업은 왕자 요와 소가, 서경에서 착실히 세력을 키워가고 있던 태조의 사촌 동생 왕식렴의 세력과 결탁하면서 더욱 강성해지자 ..

고려왕조실록 2021.07.13

고려왕조실록 15 - 혜종 1

고려왕조실록 15 - 혜종 1 *태조 왕건의 고뇌와 혜종의 등극 비록 삼한을 통일하였으나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지방 호족들 때문에 태조는 왕권중심으로 한 중앙정부의 통치 체계를 갖출 수 없었다는 점은 앞장에서 서술한 바가 있습니다. 해결책으로 태조는 호족들의 딸과의 혼인을 통해 인척관계를 맺음으로써 통일 왕국 내부의 위협적인 요소들을 제거하려 하였고, 이것이 먹혀들어 태조 왕건 당대에는 커다란 충돌이 없이 국정을 펼처 나갈 수 있었으나 후사 문제만 생각하면 골치가 아팠습니다. 당장 29명이나 되는 아내들 뒤에 있는 막강한 호족들의 힘이 태조를 압박해 오는 것만 같았습니다. 태조는 6명의 왕후와 23명의 부인들 사이에서 25명의 아들과 9명의 딸을 두었습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제1비인 신혜왕후 유..

고려왕조실록 2021.07.13

고려왕조실록14 - 태조 13

고려왕조실록14 - 태조 13 * 통일왕국의 탄생과 훈요십조 그리고 태조의 죽음. 후백제의 멸망에 앞서 935년 10월 신라 경순왕이 시랑 김봉휴를 보내 고려 정부로 들어오겠다는 뜻을 전해왔습니다. 고려에 신하의 예로써 굽히고 들어오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태조가 크게 기뻐하며 이를 수락하자 경순왕은 백관을 거느리고 개경으로 출발하였습니다. 신라의 수많은 백성들 또한 이에 뒤질세라 왕의 일행을 따라 북으로 행하였습니다. 30리도 넘게 이어진 경순왕의 행렬이 고려의 개경에 도착하자, 태조는 의장병을 갖추고 교외로 나가 그들을 영접하였는데, 경순왕은 태조에게 다음과 같은 취지의 글을 올려 자신의 뜻을 밝혔습니다. “본국이 오랫동안 위기를 겪고 운수가 벌써 다 진해서 왕실을 보전할 희망이 없으니 신하의 예절로서 ..

고려왕조실록 2021.07.13

고려왕조실록13- 태조 12

고려왕조실록 13 - 태조 12 *견훤 아들에게 나라를 빼앗기다. 934년 정월, 태조가 서경으로 가서 북방의 여러 진을 두루 순찰하며 국경 방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돌아왔을 때 발해국의 세자 대광현이 백성 수만 명을 데리고 와서 귀화하였습니다. 집권초기부터 민족화합 정책을 펼쳐오던 태조는 기뻐하며 그에게 왕계(王繼)라는 이름을 주어 왕실 족보에 등록하고 원보의 품계를 주어 백주고을을 식읍으로 하사하였습니다. 이처럼 발해인들을 너그럽게 포용하는 태조 왕건의 인품이 널리 알려져 그 후로도 많은 발해의 유민들이 무리지어 귀화를 하게 됩니다. 9월 정사일이 되자 태조는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운주(충남 홍성)를 정벌하였습니다. 이때 견훤과 싸워 대승을 하였는데, 이 전투가 태조가 견훤과 벌인 마지막 전쟁입니다...

고려왕조실록 2021.07.13

고려왕조실록 12 - 11

고려왕조실록 12 - 태조 11 * 통일의 기운이 꿈틀거리다. 931년 2월 정유일에 신라 경순왕은 태소 겸용을 사신으로 보내 태조에게 신라를 방문해 달라는 요청을 하고, 태조는 기꺼이 이에 응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태조는 친위대 50여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신라의 수도 경주에 입성하였는데 경순왕은 친히 궁궐 정문 밖까지 영접을 나와서 기다리다가 태조가 다가오자 절을 하며 맞이하였습니다. 태조 일행을 위한 임해전에서의 연회에서 취기가 오른 경순왕이 눈물을 흘리며 호소하였습니다. “우리나라는 운수가 불길하여 견훤에게 심중한 침해를 받고 있으니 이 통분한 사정을 어찌하면 좋겠소?” 한 나라의 왕으로 위엄과 체신도 잊은 채 눈물을 흘리는 경순왕을 보며, 임금이 되어 한 나라를 경영한다는 것이 너무나 어렵다는 ..

고려왕조실록 2021.07.11

고려왕조실록 11- 태조10

고려왕조실록 11 - 태조 10 *다시 맞붙은 고려와 후백제, 고창전투 공산 전투에서의 패배로 고려는 경상도 서북쪽의 주도권을 완전히 견훤에게 내주게 되어버렸고, 경상도로 통하는 길이 막혀버린 고려는 이 지역을 되찾으려고 애썼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러나 경상도 서부를 점령한 견훤의 군대는 약탈과 만행을 일삼는지라 이지역의 민심은 고려 태조 쪽으로 완전히 기울어 있었습니다. 견훤은 929년 7월 5천명의 군사를 이끌고 의성부(경북 의성지방의 행정부)를 급습하여 호족 홍술을 죽여 버립니다. 자신을 지지해 주던 홍술이 죽자 태조는 더 이상 견훤을 그대로 바라보고만 있을 수는 없고 아무래도 견훤과 일전을 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됩니다. 한동안 큰 전투는 없었으나 훈련에 정진해온 견훤의 군사들은 성난 노도와 같..

고려왕조실록 2021.07.11

고려왕조실록 10 ㅡ 태조 9

* 전쟁의 시작 924년 7월, 조물성(안동 부근)은 군사적인 요충지로 고려와 후백제 간에 여러 차례 전투가 벌어진 곳이었습니다. 당시에는 고려가 이를 점령하고 있었는데 견훤이 공격을 감행해 온 것입니다. 견훤은 자신의 두 아들 수미강과 양검을 직접 보내 회심의 일전을 벌였으나 성문을 굳게 닫아걸고 버티는데다가 태조가 보낸 구원병이 들이닥치자 후백제의 군대는 많은 손실을 입은 채 퇴각하고 맙니다. 이 전투가 태조 왕건이 왕위에 오르고 나서 후백제와 가진 첫 번째 전투인데, 일차는 왕건의 승리로 끝나게 되고, 그해 8월 견훤은 사절을 파견하여 옥색 말 한필을 보내 화해를 청하였지만, 조물성 전투가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닙니다. 다음해 10월, 이번에는 견훤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조물성을 다시 공격하는데 이때..

고려왕조실록 2021.07.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