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왕조실록 129

고려왕조실록 30 - 성종1

고려왕조실록 30 -성종1 * 성종의 등극과 사회개혁 981년 7월 22세의 나이로 등극한 성종은, 태조의 제4비 신정왕후 황보씨의 아들인 대종 욱과 선의태후 유씨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경종의 제3비인 헌애왕후 황보씨와 제4비인 헌정왕후 황보씨는 자매간으로 성종의 누이들입니다. 그러니까 성종은 경종과 처남 매부사이였던 셈입니다. 성종은 광종의 철권정치와 경종의 화합의 정치를 왕족의 신분으로 이를 지켜보면서 성장하였습니다. 두 선대왕의 정사를 다루는 방식이나 사회적 분위기로 보았을 때는 많은 차이가 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왕권의 강화를 위한 정치를 펼쳤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습니다. 왕권중심의 국가로 도약하는 기틀을 마련한 광종과 경종의 시대를 거치면서 고려는 당나라의 제도를 모방하여 이를 정착시키..

고려왕조실록 2021.07.20

고려왕조실록 29 - 경종

고려왕조실록 29 - 경종 3 * 경종의 온화한 치세는 빛을 잃고.... 안정기를 맞이하여 경종은 송나라와의 외교관계를 탄탄하게 다져나가는 한편 진사시를 통하여 신진 관료들을 속속 배출해내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장차 호족공신들과 상호 견제와 화합 속에서 나라를 건전하게 이끌어 주기를 기대하는 꿈나무들 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경종 혼자만의 바램이었습니다. 광종 대에 극심한 수난을 겪었으며 경종 대에 이르러 잃어버린 영광을 되찾는가 싶었으나, 경종의 이른바 화합의 정치로 권세가 아닌 임금의 일개 쫄병으로 전락한 호족들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너무나 억울하기만 하였던 것입니다. 하여 그들은 세상을 뒤집어 자신들의 이익이 실현되는 사회를 만들고자 불순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하게 됩니다. 경종 역시..

고려왕조실록 2021.07.18

고려왕조실록 28 -경종 2

고려왕조실록(28) 경종 2 *예고된 피바람.... “전하 전날 희생된 무고한 사람들의 원혼을 풀어주고 남아있는 가족들의 심정도 헤아려 주셔야 할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어느 날 왕선이 경종 앞에 나아가 광종시대에 희생된 호족들의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노복이 제 주인을 참소하고, 사사로운 원한을 빌미로 해코지를 하고자 고변하는 자들이 줄을 이었으니 생지옥이 따로 없었습니다. 이제 억울한 이의 마음을 풀어주고 잘못된 관행을 뿌리 뽑는 의미에서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이 스스로 이를 바로잡을 기회를 주어야 할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왕손이 왕에게 고변하는 내용인즉 과거에 억울한 일을 당했던 사람들이 합법적으로 복수극을 벌일 수 있도록 허용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기왕에 나라 안의 흐트러진 민심을 바로잡고 ..

고려왕조실록 2021.07.18

고려왕조실록 27 - 경종 1

고려왕조실록 27 - 경종 1 * 철권정치의 막은 내리고, 경종 즉위하다. 광종의 제1비 대목왕후 황보씨 소생인 왕주는 955년 9월에 출생하여 11세 때인 965년에 왕태자로 책봉이 되었습니다. 차남 효화태자가 어린 나이에 죽어 외아들로 자란 그는 975년 광종이 병으로 죽자 왕위를 이어받게 되니 바로 고려의 제5대 임금인 경종입니다. 호족들의 강한 세력을 꺾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서 부왕 광종이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는 과정을 지켜보아왔던 경종은 그중에서도 광종이 즉위하기 전부터 광종을 보필하였고 광종의 즉위에 결정적인 공을 세운 박수경의 죽음과 혜종의 아들 홍화군과 경종의 아들 경춘원군마저 죽여 버리는 잔인한 현실을 직접 목도하였고, 왕권사수를 위해 최측근과 친족까지 죽여버리는 냉혹한 현실에 어린 태..

고려왕조실록 2021.07.17

고려왕조실록 26 - 광종 6

고려왕조실록 26 - 광종 6 * 절대왕권의 길이 열리다. 이제 광종의 절대 권력에 맞설 만한 세력은 고려에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광종은 의심을 거두지 못하고 주변 신하들과 지방호족들 심지어는 부인 대목왕후와 자신의 아들들에게까지도 경계심을 드러내곤 하였습니다. 권력은 부자간에도 나누지 못한다더니 역시 권력에 한번 맛을 들이면 절대 내려놓기가 싫은 모양입니다. 아비가 아들을 경계하다? 사료에 세세하게 기록 된 바는 없으나 이 대목에서 한 가지 예측이 가능한 사실이 있습니다. 광종의 철권정치에 숨막혀 하던 호족들이 새로운 왕으로 바꿔치기하려는 음모가 있었을 가능성이 충분하였기 때문입니다. 반정의 주체세력은 단지 왕손들 중에서 차기 왕을 내세우기만 하면 명분이 서기 때문입니다. 혜종과 정종의 아들이 ..

고려왕조실록 2021.07.17

고려왕조실록 25 - 광종 5

고려왕조실록 25 - 광종 5 * 피를 부른 철권통치 집권과 함께 독자 연호를 사용하다가 후주가 중국 대륙을 장악하자 광종은 후주의 연호를 사용하게 됩니다. 그러나 960년 후주가 망하자 다시 독자 연호인 준풍(峻豊)을 사용하였고, 중국과 대등한 입장을 취하여 본인도 황제로 칭하고, 개성을 황도(皇都), 서경을 서도(西都)라 개칭하였습니다. 비록 962년 송에 의해 중국이 통일이 되면서 다시 송의 연호인 건덕을 사용하게 되었지만 광종은 고려황실의 위엄과 고려왕국의 자주성을 드높임으로써 군왕의 위엄을 내보이고자 한 것입니다. 이는 혹시 있을지 모를 호족들의 도전을 사전에 방지하려는 의도도 있었을 것입니다. 광종은 일부러 피를 보면서까지 자신의 정책을 밀고 나가려 하지는 않았습니다. 호족들이 워낙 강한 탓도..

고려왕조실록 2021.07.17

고려왕조실록 23 - 광종 3

고려왕조실록 23 - 광종 3 * 얻은 광종, 노예를 해방하라.... 956년 어느 날, 마땅한 인물을 찾지 못하여 고심하고 있던 광종 앞에 뜻밖의 인물이 나타나는데 그가 바로 쌍기(雙冀)라는 자입니다. 후주의 봉책사 설문우를 따라 고려에 왔던 그는 병이 나는 바람에 중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치료 중이었는데 어느 날 광종은 그를 궁으로 불러 대화를 나누던 중 그가 바로 자신이 찾고 있던 바로 그런 인물임을 간파하고 자신의 신하로 삼게 됩니다. 오대십국 시대 중 오대 최후의 왕조로서 951년 건국된 후주는 고려의 상황과 비슷한 나라로 당시 나라의 기틀을 다져 가는 시기였습니다. 이시기에 쌍기는 왕권을 강화하고 나라의 기틀을 다지는데 큰 역할을 한 사람이었습니다. 쌍기에게 반한 광종은 후주의 태조에게 사신을..

고려왕조실록 2021.07.17

고려왕조실록 22 - 광종 2

고려왕조실록 22 - 광종 2 * 멀리 뛰고자 웅크린 세월, 드디어 날개를 얻다.... 어느 정도 정세의 안정을 이룬 광종은 임금으로서의 지위와 위엄을 확고히 하고 이를 대내외에 알리고자 하였습니다. 중국과의 외교관계를 더욱 밀접하게 유지하면서도 광덕이라는 연호를 사용하는데 이는 중국에 종속된 국가가 아니라 자주국가임을 대내외에 알리고, 임금으로서의 권위를 세우고자 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고려 내부에 태생적으로 존재하는 호족들과의 갈등과 왕족들 간의 갈등을 방치해 둔 채 스스로를 다스리고 나라를 안정시키느라 상당한 세월을 보낸 광종은 956년 즉위 7년 만에 드디어 개혁의 첫 발을 내딛게 됩니다. 이는 집권초기부터 개혁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여 7년 동안 어느 정도 개혁안을 마무리 지었다고 볼 수 있습..

고려왕조실록 2021.07.17

고려왕조실록 21 - 광종 1

고려왕조실록 21 - 광종 1 * 최후의 승리자 태조 왕건이 삼한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그리고 통일 후 나라의 기틀을 다지는 과정에서 지방 호족들과의 혼인을 결속의 수단으로 이용하였다는 사실은 앞에서 몇 회에 걸쳐 서술한 바가 있습니다. 이 때문에 왕가와 지방 호족간의 기형적인 공존형태가 시작되었고 상황에 따라서는 왕가와의 혼인을 빌미로 오히려 기존의 자신의 파워 보다 훨씬 강력한 세력을 구축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단지 한울타리의 가족관계이니까 왕가에 대항하여 반란을 도모할 염려가 없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이는 훗날 피비린내 나는 왕권 쟁탈전의 빌미가 되기도 한 것입니다. 혜종과 정종의 시기를 거처 광종의 집권이 이루어진 7년 가까운 시기에 2천명 이상의 사람들이 희생되었음은 역사의 기록을 통해 알 수..

고려왕조실록 2021.07.17

고려왕조실록 20 ㅡ 정종 2

고려왕조실록 20 - 정종 2 *살상의 죄과가 너무 무겁구나.... 앞장에서 언급하였듯이 많은 사람을 희생시키며 권좌에 오른 정종은 수도 개경에서의 생활이 불안하여 서경 천도를 실천에 옮기려하였습니다. 겉으로 내건 천도 사유는 풍수지리상 서경이 개경보다 국운에 유리하다는 것과 북진 정책을 추진하는데도 서경이 더 유리하다는 이유를 들고 있지만 사실상 인간적인 관점에서만 보더라도 정종은 개경에 머물고 싶은 생각이 없었을 것입니다. 왕위쟁탈 과정에서 숱하게 피를 본 정종은 심리적 압박에서 좀처럼 헤어나지를 못합니다. 원래 불심이 깊었던 그는 불사리를 받들고 10리나 되는 개국사까지 걸어가서 이를 모시는 한편, 곡식 7만석을 사원들에게 헌납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거란에 포로로 잡혀있던 최광윤이 놀..

고려왕조실록 2021.07.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