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189

<조선왕조실록(183)> 망국 20 - 러일전쟁(2

망국 20 - 러일전쟁(2) 일본은 메이지유신 이후부터 대륙진출을 위해 군사력을 계속 증가시켜왔고, 러시아와의 전쟁은 불가피하다는 생각을 굳혀왔기에, 전쟁에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 육군 병력이 120만에 해군도 10년전보다 4배가 커졌다! 일본은 러시아의 남하정책에 위기감을 느낀 영국, 미국과 동맹을 맺고, 조선과 한일의정서를 체결하면서 전쟁 준비를 착착 진행해 갔습니다. - 전쟁 경비의 반은 우리가 댄다! (영국, 미국) 아무 힘이 없는 고종은 중립을 선언하는 것으로 나름의 대책을 찾았습니다. - 장차 일본과 러시아가 싸우더라도 우리는 중립이다! 난 몰라! 일본의 정보망에 의하면 러시아의 사정은 이러했습니다. - 러시아의 힘이 우리보다 훨씬 강하나 여기는 극동! - 유사시 유럽에 주둔한 병력과 물자,..

조선왕조실록 2021.06.19

입력하세요.<조선왕조실록(182)> 망국 19 - 러일전쟁(1)

망국 19 - 러일전쟁(1) 1896년 아관파천, 1897년 환궁 및 대한제국 선포 이후, 몇 년간은 일본과 러시아의 세력이 균형을 이룬 시기였습니다. 고종은 나름대로 자주국방을 생각하면서 군사력을 키웠으나, 그 규모는 겨우 궁궐수비를 할 수 있는 수준에 불과했으므로, 조선이 자력으로 나라를 지키기는 참으로 어려웠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이 사는 길은 러시아가 일본을 대 놓고 막아 주거나, 일본과 러시아가 계속적으로 세력 균형이 이루어지거나, 열강 모두가 조선에 관심을 가져 어느 한 나라가 조선을 집어 삼키는 것을 막는 환경이 조성되는 것뿐이었습니다. 고종은 이런 관점에서, 조선의 독립국임과 중림국임을 선포 하였지만, 힘이 없는 이런 선포는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

조선왕조실록 2021.06.19

<조선왕조실록(181)> 망국 18 - 아관파천(2)

망국 18 - 아관파천(2)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아관파천에 결정적 역할을 했던 사람 중 하나는 엄상궁 입니다. 그녀는 5살의 어린 나이에 경복궁에 들어가 후에 명성왕후의 시위상궁이 되는데, 못생기고 뚱뚱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일개 궁녀에 불과했던 엄상궁이 놀랍게도 고종의 눈에 들어 승은을 입었고, 결국 명성황후의 진노를 사 32세 때 궁궐 밖으로 쫓겨났습니다. 그런데 1895년 일제에 의해 명성황후가 살해되고 5일이 지난 후 고종은 10년 전에 내쫓긴 엄상궁을 불러들였습니다. 그리고 아관파천이 있기 며칠 전부터 엄상궁은 심복 궁녀 하나를 대동하고 가마 두 채로 궁궐 출입을 했습니다. 이와 같이 가마 두 채에 대한 일본군의 경계를 해제시킨 후, 사건 당일 다시 가마 두 채에 고종과..

조선왕조실록 2021.06.19

<조선왕조실록(180)> 망국 17 - 아관파천(1)

망국 17 - 아관파천(1)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김홍집 등 친일 내각의 단발령 실시는 친일내각과 그 배후세력인 일본에 대한 백성들의 감정을 극단적으로 자극하여 전국 각지에서 의병항쟁이 일어났습니다. 한편, 태평양 진출을 위해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해야만 했던 러시아는 일본이 사실상 조선을 지배해 가는 과정을 그대로 두고 볼 수 없었습니다. - 반일감정 등을 활용해 임금을 러시아 공사관으로 모신다! - 일본이 화를 내겠지만, 그렇다고 우리와 전쟁을 하려 들지는 못할 것이다! 1896년 2월 11일, 친러파인 이범진, 이완용 등은 러시아 공사 베베르와 사전 협의하여 고종이 총애하던 엄상궁을 통해 고종에게 접근한 후, 고종에게 왕실의 안전을 위해 잠시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길 것을 종용했습니다. 고종 역시 ..

조선왕조실록 2021.06.19

<조선왕조실록(179)> 망국 16 - 명성황후 시해(4)

망국 16 - 명성황후 시해(4) 갑작스런 상황 앞에 고종은 몹시 당황하였습니다. 일본군이 경복궁을 포위하자 외국 공사관에 구호를 요청하기도 하였으나 무의미했습니다. 고종은 낭인들의 주의를 돌려 명성황후를 보호하고자 밀실의 뒷문을 모두 열고 방 문 앞으로 직접 나섰는데, 낭인들은 칼을 휘두르며 한 나라의 임금인 고종의 어깨와 팔을 끌고 다니기도 했고, 무단 침입을 꾸짖는 고종의 어깨에 손을 얹어 주저앉히기까지 했습니다. 또한 태자도 다른 방에서 붙잡혀 머리채를 휘둘리고 관이 벗겨지고 칼등으로 목 줄기를 얻어맞는 수모를 당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날 오전 9시 20분, 주한 일본 공사관에서는 본국 육군참모부에 전문 한 장을 보냈는데, ‘극비’라는 붉은 낙인이 찍힌 이 전문에는 ‘국왕무사 왕비살해’라는 문구가..

조선왕조실록 2021.06.19

<조선왕조실록(178)> 망국 15 - 명성황후 시해(3)

망국 15 - 명성황후 시해(3) 조선 정부가 친일본 성격의 훈련대의 해산을 명령한 사실을 들은 미우라는 거사 날짜를 당일인 10월 8일 새벽으로 바꾸고 용산으로 무장한 낭인들을 집합시켰습니다. 또한 일본군, 순사, 조선인 몇을 규합하여 공덕리 대원군 별장을 찾아 대원군을 경복궁으로 밀어냈습니다. 이 날 새벽 4시경 이미 일본인 교관에게 훈련받은 조선군 약 250~300명 등 일본군 측 병력이 궁궐을 포위한 상태였고, 5시경 대원군이 도착하자 일본군 수비대가 미리 준비한 긴 사다리를 건넸고, 일본 순사들이 담을 넘어 빗장을 풀었습니다. 이어서 일본 낭인들과 부역 조선인들이 광화문을 넘어 경복궁 앞에 이르렀고, 곧 춘생문, 추성문 등으로 일본군과 조선인 근위대 병력이 소리를 지르며 쳐들어와 경복궁을 포위하..

조선왕조실록 2021.06.19

<조선왕조실록(177)> 망국13 - 명성황후 시해(2

망국 13 - 명성황후 시해(2) 일본의 생각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 조선이 일본의 강한 힘을 보고도 러시아를 통해 일본을 견제하려는 등의 정책을 쓰는 것은 왕비의 책략이다. 왕비는 아울러 친일 개화당을 없애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 지금 왕비를 없애지 않으면 조선 보호국화에 문제가 생길 것이며, 왕비를 해쳤다는 국제적 비난은 잔꾀를 써 벗어나거나 그냥 그대로 감수할 수 있다. 일본은 이노우에에서 미우라 고로로 공사를 교체했습니다. 미우라는 일본군 중장 출신으로 조선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으나, 어찌된 일인지 조선 공사로 왔고, 또 어찌된 일인지 이노우에는 보름 넘게 공관에서 미우라와 함께 지낸 후 일본으로 돌아갔습니다. 이는 미우라가 특수 임무를 띠고 조선에 왔으며, 이노우에가 미우라와 더불어 왕비..

조선왕조실록 2021.06.19

<조선왕조실록(176)> 망국 13 - 명성황후 시해(1)

망국 13 - 명성황후 시해(1) 청일전쟁에서 청의 절대 열세가 확인되고 농민군 패배도 가시화되던 즈음, 일본 정계의 거물 이노우에가 공사로 한국에 부임해 왔습니다. - 내 손으로 조선을 보호국으로 만들겠도다! - 그러자면 안으로는 지배의 편의를 위한 제도를 만들고, 밖으로는 일본 외에는 조선에 간섭을 하지 못하도록 해야겠지? 이노우에는 청나라와 밀약을 도모한 대원군을 끌어 내리고, 왕비의 정치개입을 막는 한편, 갑신정변 때 일본으로 튀었던 박영효 등 친일 인사로 내각을 구성하였습니다. 이노우에는 고종에게 홍범 14조를 반포하게 하여 지배를 편이하게 하기 위한 각종 조치를 취하고, 청나라를 제압한 후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하는 등 보호국화, 즉 식민지화를 위한 계획을 착착 진행했습니다. 그런데 예상치 못..

조선왕조실록 2021.06.19

<조선왕조실록(175)> 망국 12 - 조선의 1894년(10)

망국 12 - 조선의 1894년(10) 조선 동학 농민군은 동학농민전쟁에서 가장 큰 전투이자 분수령이었던 12월 5일부터의 우금치 전투에서 관군, 일본군과 최선을 다해 싸웠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우금치 마루는 농민군의 시체로 뒤덮여갔습니다. 참혹한 패배였습니다. 압도적 수적 우세에서 나오는 자신감과 종교적 신념에서 나오는 용맹성으로 무장한 농민군이었지만, 현대식으로 무장한 소수의 일본군을 당해내지 못했습니다. - 농민군은 남접 북접 합쳐 2만, 조선군 3천에 일본군 2천. 당시 농민군이 갖고 있던 총은 심지에 불을 붙여 쓰는 화승총으로 사정거리가 불과 100보에 분당 2발을 발사하는 수준인데다 그마저도 갖지 못한 사람은 죽창으로 싸워야 했습니다. 그에 반해 일본군은, 사정거리가 400-500보를 넘고 분..

조선왕조실록 2021.06.19

조선왕조실록174-망국11-조선1894(9)

망국 11 - 조선의 1894년(9) 경복궁을 점령한 일본군으로부터 전권을 약속받고 일본 측과 손잡아 왕비 쪽을 눌렀으나, 대원군은 곧 자신이 단순한 이용물에 불과함을 깨닫고, 승부수를 띄웠습니다. - 어떻게든 왜놈들과 친일관료들을 쓸어버려야 한다...!!! 대원군은 평양에 진을 치고 있던 청군(아직 일본군에 깨지기 전임)과 동학 농민군에 각기 밀서를 보냈습니다. - 북에서는 청군이, 남에서는 농민군이 협공해 일본군을 쓸어버리자! 이 과정에 대원군은 유림에도 일본을 몰아내기 위한 의병을 촉구했으나, 유림은 거절했습니다. - 향기나는 풀은 악취나는 풀과 한 그릇에 담기지 않는 법. 우리의 적은 저 무도한 동학당이다. 책상머리 앉아서 책이나 읽는 유림(도대체 머리에 뭐가들었나?) 젤로 힘든건 역시 서민들의 ..

조선왕조실록 2021.06.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