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189

<조선왕조실록(162)> 고종 20 - 갑신정변(3)

고종 20 - 갑신정변(3) 다케조에 신이치로 공사의 행보가 급해졌습니다. 다케조에는 고종에게 조선이 지급한 배상금 중 40만 원을 돌려주며 고종의 환심을 사는 한편, 박영효를 만나 언질을 주었습니다. - 청국이 곧 망할 것인데,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돕겠소. 다케조에를 다시 만난 김옥균 등은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했습니다. - 여러 대신들과 각국 공사가 참여하는 우정국 낙성식 피로연을 디데이로 삼는다. - 이곳에서 민씨 척족 세력 등 간신배를 모조리 처치하고 전하를 경우궁으로 모신다. - 즉시 새정부를 구성하고 개혁 법령을 내 놓는다. - 일본군이 즉각 출동해서 호위를 해 주는 것이 필요하므로 일본의 의지를 다시 한 번 확인한다. 개화당 인사들의 잦은 회동, 전과 다른 일본 정부와 다케..

조선왕조실록 2021.06.07

<조선왕조실록(161)> 고종 19 - 갑신정변(2)

고종 19 - 갑신정변(2) 고종과 중전 그리고 민씨 척족세력이 추진하는 온건한 방식의 중국식 개화정책을 반대하고, 분명한 개화와 개혁을 추진하겠다고 모인 이들을 세간에서는 개화당이라 불렀습니다. -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 서재필, 유길준 등 그 중 대표는 30대 초반의 김옥균으로서, 그는 글이며 글씨, 언변, 사교성, 수완 등 다재다능한 사람으로, 이들은 수신사 등으로 일본, 미국 등을 다니며 문명개화의 현실을 확인하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이들은 특히 일본 정계의 실력자들이나 유명 학자들을 만나 교류하면서, 일본의 입장에 선 주장들을 의심없이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 조선이 개화하고 부국강병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중국으로부터 자주독립해야 합니다. - 우리 일본은 조선의 자주독립을 ..

조선왕조실록 2021.06.07

<조선왕조실록(160)> 고종 18 - 갑신정변(1)

고종 18 - 갑신정변(1) 임오군란을 빌미로 출병한 중국군대는 대원군을 중국으로 압송해 가는 한편, 서울에 진주해 있으면서 조선을 다스리는 총독부의 역할을 자임하였습니다. 치안을 맡고, 여러 조약을 통해 불평등한 관계를 더욱 강화시켜, 과거 사대관계를 넘어 조선을 식민지로 대우하려 들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고종은 임오군란의 충격에서 벗어나 백성들에게 사과문을 내고, 곧이어 외국과의 교류와 개화가 불가피함을 설명하는 윤음(조선시대 국왕이 국민에게 내리는 훈유의 문서)을 내렸습니다. - 살기 위해서는 불가피하다! 고종의 이러한 조치에 위정척사를 주장하는 소가 있기는 했지만 미미했고, 고종은 들어줄 생각이 없었습니다. 고종은 개화정책을 이끌 기구로 통리군국사무아문을 설치하고 리홍장이 추천한 뮐렌도르프를 협..

조선왕조실록 2021.05.30

<조선왕조실록(159)> 고종 17 - 임오군란(4)

고종 17 - 임오군란(4) 군중들이 대궐을 범했을 뿐만 아니라 종친과 신하들을 마음대로 때려 죽인 초유의 사태인 군란이 대원군의 등장으로 마침내 수습되었습니다. 고종은 중전의 시신도 보지 못한 채 국상을 선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 중궁전이 오늘 승하하였다. 시신이 없어 왕비의 옷으로 대신해 입관절차를 밟았습니다. 중전이 죽었다는 것을 본 사람이 하나도 없는데 대원군은 무슨 생각으로 국상을 선포하였을까. 그것은 대원군의 전략이자 작은 배려였을 것입니다. - 이제 중전은 살아도 산 목숨이 아니지. 다시 환궁할 일은 없을 것이니 어디서 목숨이나 부지하시오. 다시 권력을 잡은 대원군은 모든 것을 자신이 섭정하던 때로 되돌리려 했습니다. 그러나 개항이 가져 온 새로운 질서는 그것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

조선왕조실록 2021.05.30

<조선왕조실록(158)> 고종 16 - 임오군란(3)

고종 16 - 임오군란(3) 임오군란의 발생에 대원군이 어떻게 연결된 것인지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지만, 이 사태의 전개를 보면 대원군이 이 군란에 연관되어 있음은 분명해 보입니다. 도성 안을 온통 휩쓴 군졸과 백성들 무리의 주동자들에게 다가 온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 대원군 합하의 심부름으로 왔습니다. 대원군의 지시와 방향 제시를 접한 군중들은 고무되었습니다. - 이제 살 길이 열렸다. 대원군 합하께서 다시 나라를 다스리면 우리는 사는거야. 군중들은 용기백배하여 다음 단계로 들어갔습니다. 그것은 범궐이었습니다. 대궐로 가는 길에 군중들은 대원군 하야의 주역 중 하나인 대원군의 형 이최응의 집을 부수고 그를 때려 죽였으며, 드디어 돈화문을 통해 대궐로 난입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통제가 불가능한 상태..

조선왕조실록 2021.05.30

조선왕조실록(157)> 고종 15 - 임오군란(2)

조선왕조실록(157)> 고종 15 - 임오군란(2) 13개월 밀린 월급 중 한 달치를 준다기에 들떠 창고 앞에 줄을 섰던 군졸들은 눈앞의 현실에 기가 막혔습니다. - 겨와 모래가 반에 냄새가 나고 그나마 양도 부족하다! - 이걸 먹으라고 주는 거야? 지금 장난하냐? 창고지기는 한 술 더 떴습니다. - 받기 싫으면 받지 말든지. 어디서 감히 큰소리야! 분노한 군졸들이 창고지기를 잡아 팼습니다. - 이 썩을 놈 말하는 것 좀 보소. 우리가 개, 돼지보다도 못하단 말이냐. 군졸들이 창고지기를 구타했다는 소식이 고종에게 보고되었습니다. 고종은 사정을 파악한 후 군졸들을 달래 돌려보내고 더 문제 삼지 말라는 지시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군졸들에 대한 급료지급을 담당하는 선혜청 제조 민겸호는 주동자 넷을 구금시켜버렸..

조선왕조실록 2021.05.30

<조선왕조실록(156)> 고종 14 - 임오군란(1)

고종 14 - 임오군란(1) 중전 민씨(후일 명성황후)는 여흥 민씨로 여주에서 태어났습니다. 꽤 그럴듯 했던 집안은 아비 민치록이 이른 나이에 죽게 되면서 몰락했고, 중전은 8세때부터 서울에서 어머니와 단 둘이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중전의 모친은 먼 친척 민승호를 양자로 들여 제사를 받들게 하였는데, 민승호는 대원군의 부인의 친동생이었습니다. 중전은 어렸을 때부터 무척 총명하고 단정하여 주변에 칭찬이 자자했고, 이즈음 부대부인 민씨는 중전을 눈 여겨 보았습니다. 결국 중전은 위와 같은 인척관계와 집안에 세도를 부릴 세력이 없다는 점 등이 부각되어 중전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전에 본 바와 같이 대원군이 최익현의 소 등을 계기로 10년 권력을 손에 놓고 물러나게 되었는데, 여기에는 중전의 역할이 컸습..

조선왕조실록 2021.05.30

<조선왕조실록(155)> 고종 13- 개항 이후의 변화와 강력한 반발

고종 13 - 개항 이후의 변화와 강력한 반발 강화도 조약 체결과 함께 일본은 사신 파견을 요청했고, 조선은 김기수 등 70명을 수신사로 보냈습니다. 일본을 둘러보고 온 김기수는 고종에게 보고하였습니다. - 저들은 여러 나라의 기계들을 모두 배웠고, 풍속이 대개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데 힘쓰고 있었사옵니다. 한편, 개항 이후 일본과의 무역 규모가 중국과의 무역규모보다 훨씬 커졌고, 일본의 정치적 영향력도 커져가자 급해진 것은 중국이었습니다. - 이대로 두었다간 일본이 조선을 통째로 먹고 말거야. 때마침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등이 조선과의 통상을 할 수 있도록 중국에 부탁을 해 오자 중국 북양대신 리홍장은 조선에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 서양의 여러 나라들은 오로지 통상하자는 것! 귀국이 그들과 수..

조선왕조실록 2021.05.30

<조선왕조실록(154)> 고종 12- 운요호 사건, 강화도조약(2)

고종 12 - 운요호 사건, 강화도조약(2) 1876년(고종 13년) 일본 배 4척이 또 다시 강화로 접근했습니다. - 귀 국의 대신을 만나 의논하고 조약을 맺으려 하는데, 응하지 않는다면 곧바로 서울로 올라갈 것이오. - 대체 조약이라는 게 무엇이오? - 두 나라가 국제적으로 널리 통용되는 규범에 따라 체결하는 약정입니다. - 이미 수백 년 동안 무역을 해왔는데 이제 와서 조약이라는 것을 맺을 필요가 있소? - 무역을 하는 나라는 조약을 맺어야 하는데 그것이 국제적 관행이오. - 국제적 관행 ??? 1875년 2월 10일, 강화도 조약(조일수호조규) 체결을 위해 마주앉은 조선 대표 신헌과 일본 대표 구로다 사이에 처음으로 오간 이 대화는 이 조약의 성격을 단적으로 말해 줍니다. - 여기 초안을 잡은 1..

조선왕조실록 2021.05.30

<조선왕조실록(153)> 고종 11- 운요호 사건, 강화도조약(1)

고종 11 - 운요호 사건, 강화도조약(1) 메이지유신으로 근대화한 일본은 급속히 제국주의화가 되어 대륙침략의 첫 단계로 정한론(征韓論)을 내세우며 조선을 침략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이즈음 조선에서는 강경한 쇄국양이정책을 고수하던 대원군이 실각하고 고종이 친정을 시작하면서 민씨 척족 세력이 집권하게 되었는데, 일본에게 있어 대원군의 실각은 고무적 현상이었습니다. 일본은 1875년 5월 이미 대만정벌을 시도해 대만을 점령한 바 있었는데, 조선이 이 소식을 듣고 겁을 먹었다고 판단하고 다음과 같은 외교 방안을 마련하였습니다. - 대원군의 재집권 전에 개항을 성취하여야 한다. - 일본 군함 한 두 척을 파견해 해로를 탐측하면서 무력시위를 벌이면 일본이 교섭에 유리한 지위를 획득할 수 있다. 일본은 이러..

조선왕조실록 2021.05.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