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189

조선왕조실록173-망국3-조선1894(8)

망국 10 - 조선의 1894년(8) 청일전쟁 승리로 조선을 사실상 점령한 일본이 꺼내 든 두 번째 카드는 내정개혁이었습니다. 그것이 이른바 갑오경장입니다. 일본은 이를 위해 군국기무처를 만들어 3개월 동안 무려 210개의 의안을 심의, 의결하였는데, 그 변화는 조선 봉건주의에서 생각해 내기는 어려운 실로 획기적인 것들이었습니다. 대표적인 것들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궁내부를 두어 왕실을 국정과 분리 - 신식화폐를 발행하고 모든 조세는 금납으로 명문화 - 도량형 통일 - 노비제, 백정신분 등 폐지 - 과거제 폐지 - 과부의 재가 허용, 조혼과 인신매매 금지 - 사법관 제도 개시, 연좌제 폐지 유럽의 근대사회는 르네상스 이후 종교개혁, 산업혁명, 프랑스 혁명 등 문화적 혁신과 과학적 문명의 진보를 통..

조선왕조실록 2021.06.19

<조선왕조실록(172)> 망국 9 - 조선의 1894년(7)

망국 9 - 조선의 1894년(7) 1894년 9월 15일, 평양에 집결한 일본군은 청나라 군대를 기습했고, 청군은 지리멸렬하다 완전히 무너져버렸습니다. 말 그대로 파죽지세였습니다. - 청군 사망자 2,000명에 부상자가 4,000명, 일본군 사상자 500여 명 그 이튿날인 9월 17일에는 압록강 하구에서 청나라 북양함대와 일본 함대가 맞붙었는데, 청나라 북양함대가 화력에서 우위에 있었음에도 일본 함대에 무참히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한편, 평양에서 패배한 청나라 군대는 압록강 넘어 강변에 요새를 만들고 일전을 준비했으나, 병력을 보충한 일본군은 10월 24일 밤 압록강을 건너 청군을 무너뜨렸고, 다음날에는 단둥의 청군 기지를 공격하여 중국 본토에 발판을 마련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곧이어 일본군은 요동반도 ..

조선왕조실록 2021.06.19

실록 <(169-1)>- 동학 탄생의, 시대적 배경과 이념 -

실록 - 동학 탄생의, 시대적 배경과 이념 - * 진주민란 * 진주민란의 직접적인 발생 계기는 경상우병사 백낙신의 탐학과 착취에 있었다. 백낙신이 민란이 일어나기 전 몇 년 동안 착취한 돈만도 약 5만 냥에 달했는데, 쌀로 환산하면 약 1만 5천 석이나 되는 엄청난 양이었다. 게다가 당시 진주목에서는 지금까지 지방 관리들이, 불법적으로 축낸 공전이나 군포 등을 보충하기 위해, 그것을 모두 결세에 부가시켜 해결하려 했는데, 그 액수가 2만 8천 석에 축난 환곡만 해도 2만 4천 석이나 되어, 농민 부담이 급격하게 가중될 처지에 있었다. 이에 농민 봉기군들은 스스로 초군이라 부르면서, 머리에 흰띠를 두르고 진주성 으로 쳐들어 갔는데, 그 수가 수만 명에 이르렀다. 이에 당황한 우병사 백낙신은 환곡과 도결의 ..

조선왕조실록 2021.06.07

<조선왕조실록(169)> 망국 6 - 조선의 1894년(4)

망국 6 - 조선의 1894년(4) 다시 조정의 탄압이 시작되자 전봉준은 무장현의 동학 접주 손화중을 찾았습니다. - 저 소리를 들어보세. 이제 정말 때가 되었네. 손화중이 봉기에 적극 참여하면서 태인현의 농민들도 접주 김개남의 주도 아래 봉기하자 그 사기가 하늘을 찔렀고, 드디어 3월에 지도부를 조직하는 등 모양을 갖추었으며, 5월 백산면에 모인 군중은 1만 3천명에 달했습니다. - 총대장 : 전봉준 - 총관령 : 김개남, 손화중 등 등 전봉준은 격문을 손수 지어 봉기의 이유를 널리 알렸습니다. - 조금도 주저하지 말고 이 시각으로 일어서라. 만일 기회를 잃으면 후회를 하여도 미치지 못하리라. 또한 네 가지 군율을 정했습니다. - 1. 사람을 죽이지 말고 물건을 해치지 말 것. - 2. 충효를 다하여 ..

조선왕조실록 2021.06.07

<조선왕조실록(168)> 망국 5 - 조선의 1894년(3)

망국 5 - 조선의 1894년(3) 오랫동안 지주와 관리의 수탈에 이를 갈며 기회를 엿보던 전봉준이 드디어 일어섰습니다. 전봉준은 뜻을 함께 해 온 사람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 이제 우리가 꿈꿔 온 일을 펼칠 때가 되었다. 의견을 모은 그들은 사발통문을 만들어 돌렸습니다.(사발통문은 사발 모양으로 발기자들의 이름을 빙 둘러 쓴 통문을 말함) 그 내용은 이전의 민란에서 보였던 주장들과는 질이 달랐습니다. - 고부성을 함락해 조병갑을 목베어 죽일 것. - 군기고와 화약고를 점령할 것. - 군수에게 아부하여 백성을 침탈한 탐리를 엄히 징벌할 것. - 전주 감영을 함락하고 서울로 나아갈 것. 그동안의 민란은 과격하기는 하였으나 수령을 잡아 죽일 생각을 하지 못하는 등 기본적으로 나라의 틀을 깰 엄두를 내지 못..

조선왕조실록 2021.06.07

<조선왕조실록(167)> 망국 4 - 조선의 1894년(2)

망국 4 - 조선의 1894년(2) 1894년 1월 10일 저녁, 전라도 정읍 말목장터에서 울리는 때 아닌 풍물소리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수천을 헤아리는 군중들이 모이자 그들 앞에 5척 단신의 사내 하나가 우뚝 섰습니다. 이 사람이 바로 담력은 산같이 컸고 눈은 샛별같이 빛났다던 전봉준입니다. - 우리가 피땀 흘려 지은 곡식이 저 악랄한 자들에게 들어간 지 오래되었소. 여기에 조병갑마저 다시 부임해와 어제의 행패를 오늘 또 하고자 합니다. 이 기회를 놓치면 영원히 후회할 것이오. ---------------- 1855년에 태어난 전봉준의 집안은 본디 벼슬을 했던 양반 가문이었으나 아버지 대에 이르러 관직에 진출하지 못하자 몰락해 간 것으로 보입니다. 전봉준은 고창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후 떠..

조선왕조실록 2021.06.07

<조선왕조실록(166)> 망국 3 - 조선의 1894년(1)

망국 3 - 조선의 1894년(1) 혹세무민의 혐의로 한양으로 압송되던 동학 교주 최제우는 고종 즉위 즈음 효수되었습니다. 그러나 교주의 죽음에도 동학의 교세는 사그라지지 않았습니다. 외세의 접근에 불안해하고 탐관오리의 횡포에 절망하던 백성들은 동학에서 의지할 곳을 찾았습니다. - 우리 동학은 신분의 귀천도 남녀도 차별하지 않습니다. (위아래가 없다고? 말도 안되는 소리 우린 양반이고 상놈과 노비는 당연한 것인데 이런 반사회적인 생각을 갖고 있다니 이런것이 이단이야) 그러나 동학을 믿는 것은 나라에서 금한 일이었으므로, 지방 수령들은 동학교도들을 붙잡아 탄압했습니다. - 당장 주리를 틀 것이로되, 스무 냥만 내면 한 번 봐주지. 어쩔래? 동학은 지친 백성들의 폭발적인 지원속에 충청, 전라지역 으로 확대되..

조선왕조실록 2021.06.07

<조선왕조실록(165)> 망국 2 - 잃어버린 10년(2)

망국 2 - 잃어버린 10년(2) 임오군란 때 납치된 대원군이 돌아오자 백성들은 열렬히 환영했습니다. 고종도 직접 나가 맞았으나 한 마디 말도 건네지 않았습니다. - 이런 싸가지 고종은 형식상으로 최대한 극진히 대우하면서도 사실상 가택연금을 시켰습니다. - 조정 신하는 명을 전하는 것을 제외하고 일체 사적방문을 금한다! 20대의 오만한 위안스카이를 대장으로 한 중국군은 조선 에서의 영향력을 키워갔으나 일본, 러시아, 영국, 미국 등이 지켜보는 환경이었기 때문에 일정부분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때문에 1884년 이후의 조선 정세는 중국이 주도하는 가운데 일본, 러시아 등과 묘한 세력균형이 이루어진 형세 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형세는 1894년까지 10여년 간 이어졌습니다. 돌이켜보면, 이와..

조선왕조실록 2021.06.07

<조선왕조실록(164)> 망국 1 - 잃어버린 10년(1)

망국 1 - 잃어버린 10년(1) 정변 실패 후 청의 영향력과 간섭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고, 20대의 위안스카이는 총독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이 와중에 정변을 부추키고 가담까지 했던 일본은 군함을 끌고 시위를 벌이며 조선에 책임질 것을 요구해 한성조약을 통해 넉넉한 보상을 받아갔고, 이토 히로부미를 전권대사로 삼아 리홍장과 담판해 텐진조약을 통해 조선에서의 상당한 영향력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수완을 부렸습니다. 김옥균 등 개화당의 꿈은 왜 3일천하로 끝날 수밖에 없었는가? 그들은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모델로 삼아 하루빨리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려는 사명감에 불탔으나 여러모로 부족했습니다. 국민적 지지를 얻지 못했고, 저항을 막아 낼 자체의 무력이 전혀 없었으며, 중국이 청프전쟁 때문에 간섭하지 못할 ..

조선왕조실록 2021.06.07

<조선왕조실록(163)> 고종 21 - 갑신정변(4)

고종 21 - 갑신정변(4) 정변이 일어난 지 3일째! 김옥균 등이 과감한 시도로 권력을 틀어쥐긴 했으나, 그 토대가 없었습니다. 중국군 대장 위안스카이는 곧 상황을 파악했습니다. - 국왕의 의지와 별개로, 소수의 젊은 애들이 약간의 일본군과 조선군 병력을 믿고 벌인 어처구니없는 불장난! 일본도 별 대책은 없어 보인다! 저녁이 가까워질 무렵, 위안스카이는 중국군대를 이끌고 궁궐 앞에 당도했고, 조선군 좌·우영 군사도 그 뒤를 따랐습니다. 압도적인 인원과 화력을 보유한 위안스카이는 포와 총을 쏘며 궐 안으로 밀고 들어왔고, 일본군과 소수 조선군이 맞섰으나 역부족이었습니다. 당황한 다케조에는 철수를 결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에 김옥균 등은 고종을 인천으로 모시고 가 후일을 도모하자고 주장하였으나, 고..

조선왕조실록 2021.06.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