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189

<조선왕조실록(152)> 고종 10 - 일본의 대 변신!

고종 10 - 일본의 대 변신! 1853년 그러니까 조선(병자수호조약으로 원산 1880년3월23일 통상개시)보다 불과 27년 일찍 외세에 의해 개항한 일본은 1894년 청일전쟁을 일으켜 세상의 예상과 달리 청나라를 이겼고, 10년 후인 1904년에는 러시아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켜 또 이겼으며, 그 이후 세계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키기까지 하였습니다. 조선과 별 차이가 없던 일본은 어떻게 이렇게 발전해 나갔고, 반면에 일본과 별 차이가 없던 조선은 어떻게 하다가 세계 강국은커녕 일본에 힘 한 번 못써보고 나라를 통째로 빼앗기는 신세가 되었을까. 국민성 차이인가? 모든 국민은 위대하다는 점에서 공통되므로 결국 지도층의 인식과 자질, 능력차이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 최초로 문호를 개방한 18..

조선왕조실록 2021.05.30

<조선왕조실록(151)> 고종 9 - 대원군의 실각(3)

고종 9 - 대원군의 실각(3) 최익현이 실로 과감하게도 살아 있는 권력 대원군의 하야를 요구하자 즉각 대신들이 최익현의 국문을 청하였습니다. - 아래 부분의 흉언은 인륜의 큰 변괴이옵니다. 재미있는 것은 대신들이 최익현을 성토하면서도 ‘아래 부분의 흉언’이라고 할 뿐 대원군의 하야를 주장한 것이 문제라는 식의 성토를 대놓고 하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최익현을 성토하지 않았다가 대원군의 눈에 날 것이 두려워 나서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대원군 하야 주장 부분을 지나치게 부각시키다가 고종이 친정이라도 하는 날에는 낭패를 볼 것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 줄 서기가 참으로 고약하다! 고종은 최익현을 성토하는 신하들의 상소를 받고 다음과 같은 조치를 내렸습니다. - 국청은 하되 형장은 가하지 말라. - 시골 사..

조선왕조실록 2021.05.30

<조선왕조실록(150)> 고종 8 - 대원군의 실각(2)

고종 8 - 대원군의 실각(2) 대원군은 10여년간 권력을 한 손에 쥔 채 대내적 개혁과 대외적 대응을 주도하였습니다. 임금도 아닌 대원군의 독주에 불만분자들이 생기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현상이었습니다. 우선 고종의 불만이 가장 컸습니다. 성인이 된 군주가 왕권을 직접 행사하고픈 건 본능이라 하겠습니다. 속으로만 끙끙 앓는 고종에게 영민한 중전이 위로 겸 염장을 질렀습니다. -고금을 통 털어 성인이 된 임금을 대신해 아버지가 왕권을 행사한 적은 없나이다. 전하께서 친정을 하지 못하는 것은 종사에 죄를 짓는 것이옵니다. 이 일로 고종은 중전의 영민함에 매료되었고 어느덧 안팎의 일을 중전과 상의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다음으로 대원군의 형 흥인군의 불만이 만만찮았습니다. 그 아들의 출사가 대원군으로 인해 막..

조선왕조실록 2021.05.30

<조선왕조실록(149)> 고종 7 - 대원군의 실각(1)

고종 7 - 대원군의 실각(1) 대원군의 개혁은 성공한 것인가? 그렇습니다. 대원군의 개혁은 조선 역사에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대성공이었다고 봅니다. 그는 60년 묵은 세도정치를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청산했으며 수 백년 묵은 조선의 병폐들에 대해 과감히 메스를 댔습니다. 어느 것 하나도 기득권의 반발을 우려해 눈치보기를 했다면 역풍에 밀려 실패했을 사안들로서, 개혁군주라는 영조나 정조도 전혀 이루지 못한 일입니다. -오척단구이나 온몸이 담력덩어리! 그러나 대원군의 개혁은 누구도 이루지 못한 대성공이었음에도 더 큰 성공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대원군의 실각과 함께 퇴색하고 말았으니 도대체 무엇이 문제였을까요. 그것은 열강의 세계침략과 전 지구적 자본주의화라는 시대적 상황에 부응한 개혁이 되지 못했기 때..

조선왕조실록 2021.05.30

<조선왕조실록(148)> 고종 6- 병인양요와 신미양요(2)

고종 6 - 병인양요와 신미양요(2) 조선을 심하게 얕보고 소수 병력만으로 중무장도 하지 않은 채 달려드는 프랑스 군! 정족산성 수성장에 임명된 양헌수는 포수들로 구성된 군대를 매복시켰다가 일제 사격을 명했고, 예기치 못한 기습에 프랑스군은 수십 명의 사상자를 낸 채 물러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 작은 나라 조선을 치자고 지구 한바퀴를 돌아 군대를 보낼 수도 없고, 실익도 없다! 이 때 프랑스군은 강화 외규장각에 있던 각종 금은궤와 주요 서적을 닥치는 대로 약탈했고 장녕전, 외규장각에 불을 지르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이후 프랑스 역사학자인 박병선 박사와 정부의 외교적 노력으로 2011년 대여라는 명목으로 외규장각 약탈 도서 상당 부분이 반환되었으니 그나마 다행입니다. 이와 같이 어찌되었든 프랑스군을 물..

조선왕조실록 2021.05.30

<조선왕조실록(147)> 고종 5- 병인양요와 신미양요(1)

고종 5 - 병인양요와 신미양요(1) 종주국으로 받들던 중국도, 바다 건너 일본도 서양 세력의 군사적 힘 앞에 굴복하고 나라의 문을 열었습니다. 조선에도 조만간 서양 세력의 위협을 동반한 통상 요구가 현실로 나타날 것이라는 예상은 누구나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 어찌할 것인가! 대원군과 조선이 선택한 방안은 과거로부터의 전통적 정책인 쇄국정책이었습니다. - 표류해 오는 외국인을 구호해 보내주되, 통상은 절대불가하다. 우리는 오랑캐와 섞이지 않고 예의를 지키며 우리끼리 살아가겠다. 대원군의 이러한 정책은 국내 정치에도 그대로 이어져 천주교를 전파하고 신봉하는 프랑스 신부와 조선의 유력자들을 가차 없이 효수하고, 신도들에 대한 색출 역시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력하고 끈질기게 행해져 천주교 신자 수 천 명이 처..

조선왕조실록 2021.05.30

<조선왕조실록(146)> 고종 4 - 경복궁 중건

고종 4 - 경복궁 중건 “경복궁을 다시 세워 왕실의 위엄을 만백성에게 보여주리라!” 대왕대비 조씨가 적극 찬동하였습니다. 다만 몇몇이 현실적인 재정문제를 이유로 소극적인 반대의견을 내었으나 대세는 찬성이었습니다. - 대원군이 한다는데... 경복궁 중건이라는 대공사가 즉각 개시되었고 한양은 물론 지방의 백성까지 자원이라는 이름으로 몰려들었습니다. 그러나 ‘자원’이 진짜 자원이 아니라 강제징수였음은 공사 개시 한 달 뒤 대왕대비의 언급에서 드러납니다. - 원납(願納)’이라면서도 부역할 수 없다면 경비라도 내야 한다며 빈부를 가리지 않고 거둬들이는 형편이라니, 이 어찌 된 일이오. 대왕대비가 거액의 내탕금을 하사하고, 종친들과 중신들이 성금을 헌납했으며, 원납이라는 이름으로 백성들로부터 돈을 징수했지만, 공..

조선왕조실록 2021.05.30

<조선왕조실록(145)> 고종 3 - 개혁 또 개혁!

고종 3 - 개혁 또 개혁! 세도정치 수십 년에 벼슬은 돈으로 거래되었고, 벼슬을 산 이들은 백성 수탈에 혈안이 되었습니다. 대원군은 집권과 동시에 탐관오리 적발에 심혈을 기울임과 더불어 조정 대신들에게도 강력한 경고를 거듭 날렸습니다. 또 세도 가문이 장악하여 권력을 송두리째 틀어쥐고 있던 수백 년 된 권력기관인 비변사를 단칼에 폐지해 버렸습니다. 또한 매점매석으로 가격의 등락을 멋대로 조정해 폭리를 취해 온 도고(都賈)를 혁파하고, 양반에게도 군포를 부과하는 호포법을 실시하였으며, 민란의 가장 큰 원인이 되었던 환곡제도를 정비해 사창을 설치하는 등 대원군은 그 동안 생각해 왔던 수백 년 묵은 폐단을 놀랍게도 과감히 처치하였습니다. 나라의 재정수입은 늘고 백성들은 기뻐했지만, 양반 기득권층의 불만이 커..

조선왕조실록 2021.05.30

<조선왕조실록(144)> 고종 2 - 대원군 정치의 시작

고종 2 - 대원군 정치의 시작 흥선대원군 이하응(1820~1898)은 조선역사상 유일하게 왕의 자리에 오른 적이 없었으면서 살아 있는 왕의 아버지로, 상당한 기간 최고의 권력을 휘두르게 됩니다. 이러한 흥선군이 대원군이 되기 전의 모습은 흔히 이렇게 표현됩니다. - 똑똑한 종친들을 모조리 죽여 버리던 안동김씨의 세도 아래 그는 일부러 파락호처럼 살며 몸을 보전했다. 먼저 당시 안동김씨는 잘났다 싶은 종친을 죄다 제거하려 들었는가. 일단 사실이 아닌 것으로 봅니다. 이런 주장을 뒷받침하는 사례로 철종 13년 종친 이하전이 사약을 받고, 종친 이호가 위리안치된 일이 언급되나, 역모에 이름이 오르게 되면 자신의 의사와 무관하게 죽음을 맞게 되는 것은 조선 종친의 운명인데다가(이 때만의 일이 아니라는 말씀!)..

조선왕조실록 2021.05.30

<조선왕조실록(143)> 고종 1- 대왕대비 조씨와 흥선대원군

고종 1 - 대왕대비 조씨와 흥선대원군 흥선군의 아들 이명복은 강화 도령 철종보다도 훨씬 왕실과 거리가 먼 인물이었습니다. 위로 거듭 거듭 올라가 사도세자에게 정조 외에 은언군, 은신군, 은전군이라는 서자가 있었는데, 은신군은 후사가 없어 인조의 아들 인편대군의 7대 손인 남연군을 양자로 들인 적이 있는데, 그 남연군의 아들 중 하나가 흥선군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흥선군의 아들이 보위라는 하늘이 준 행운을 거머쥘 수 있었는가 앞서 본 것처럼 정조 →순조 →(익종, 효명세자) →헌종 →철종으로 이어지는 임금의 비는 모두 김씨 가문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나 순조의 큰아들로서 왕이 되지 못하고 일찍 죽은 효명세자의 비만이 풍양 조씨였는데, 효명세자의 아들이 보위(헌종)에 오르게 됨으로써 자동적으로 효명..

조선왕조실록 2021.05.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