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왕조실록 129

고려왕조실록 60 - 인종 4

고려왕조실록 60 - 인종 4 * 묘청의 난. 정치가 권력이라는 단물을 내포하고 있는 한 그것을 더 많이 차지하려는 대립과 암투는 피할 수 없는 것인가 봅니다. 이자겸의 난이 정리 된 후, 개경의 문벌귀족 가운데 크게 부상한 것은 김부식 형제와 이공수(李公壽), 지저(之氐) 부자 그리고 새로이 외척이 된 임원애(任元敳) 등이었습니다. 이자겸 이래로 이들은 당시 동아시아의 새 강자로 등장한 금나라에 대해 신하의 예를 취하는 등의 외교로 대외적인 안정을 꾀하며 정권을 주도했습니다. 한편 척준경을 탄핵하는 등의 공로를 세운 정지상과 그의 천거로 등장한 묘청, 백수한(白壽翰) 등의 세력이 대두되었는데, 이들은 개경 문벌귀족과는 배경을 달리하는 서경출신의 신진관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당시 유행하고 있던 지리도참설..

고려왕조실록 2021.08.01

고려왕조실록 59 - 인종 3

고려왕조실록 59 - 인종 3 * 이자겸을 처단하라. 그런데 뜻하지 않게 신료 이수가 이자겸을 비난하고 나섰습니다. 아무리 인종이 조서를 내렸다하더라도 신하 된 입장에서 어찌 그럴 수가 있냐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이자겸은 마음에는 내키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인종에게 조서를 반납하고 맙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자겸이 왕이 되고자하는 욕망을 완전히 버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씨가 왕이 된다는 ‘십팔자도참설(十八子圖讖設,, 十八子를 합하면 李가 됨))“을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인종을 연경궁으로 옮겨 앉게 하고 여전히 척준경과 짝짝꿍이 되어 정사를 농단하며 권력을 나누어 갖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그는 왕이 되겠다고 독심을 먹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음식에 독을 넣어 인종을 두 번이나 죽이려 하였지..

고려왕조실록 2021.08.01

고려왕조실록 58 - 인종 2

고려왕조실록 58 - 인종 2 * 왕의 치욕 아무리 허수아비와 같은 왕이라지만 인종의 주위에 사람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자겸의 전횡에 불안을 느낀 인종은 드디어 뜻을 같이하는 신하 동지추밀원사 지녹연, 내시지후 김찬, 상장군 최탁과 오탁, 대장군 권수 등 이들로 하여금 이자겸을 처치하도록 명을 내립니다. 이리하여 최탁 김찬 등이 군사를 이끌고 궁에 들어가 병부상서 척준신(척준경의 동생), 척순(척준경의 아들)을 죽여 궁밖으로 던져버립니다. 이에 당황한 이자겸과 척준경은 잠시 당황하였으나 이내 척준경이 군사를 끌고 궁으로 처들어가고 이자겸의 아들 이자 수좌인 의장이 승병 300여명을 끌고 지원을 해오자, 기세가 오른 척준경은 궁궐에 불을 지르면서 처들어가 왕을 호위하고 있던 군사들을 물리치고..

고려왕조실록 2021.07.31

고려왕조실록 57 - 인종 1

고려왕조실록 57 - 인종 1 * 분쟁의 씨앗 17대 인종은 예종과 순덕왕후 이씨의 맏아들로 이름은 해, 자는 인표입니다. 그는 1115년 예종 10년에 태자로 책봉되고, 1122년 예종이 승하하자 왕위를 계승하게 됩니다. 인종은 성품이 어질고 효성이 있었으며 너그럽고 인자하였는데 왕위에 올랐다는 화려한 겉모습과는 달리 그 내면에는 수많은 갈등과 염려가 꽈리를 틀고 있었습니다. 예종에게는 여러 아우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인종이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은근히 임금의 자리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과거에도 헌종의 삼촌 숙종이 조카의 왕위를 빼앗은 것을 알고 있는 인종은 그러한 걱정으로 항상 근심에 싸여 있었고 겁도 났던 것입니다. 당시 고려 조정을 살펴보면 어느 한편으로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극히 경계하였던 예..

고려왕조실록 2021.07.31

고려왕조실록 56 - 예종 2

고려왕조실록 56 - 예종 2 * 예종의 치적 1109년 국학(國學)에 학과별 전문 강좌인 칠재(七齋)를 설치해 관학(官學)의 진흥을 꾀하였습니다. 1112년에는 혜민국(惠民局)을 설치해 빈민들의 시약(施藥: 무료로 약을 지어주는 일)을 담당하게 했고, 이듬해에는 예의 상정소(禮儀詳定所, 신분에 따른 의복제도와 공문서 양식 및 예의 등을 제정하기 위하여 설치된 관서)를 설치하였습니다. 1115년 완안부(完顔部)의 추장 아구다(阿骨打)가 여진족을 통일해 자신을 황제라 칭하고 나라 이름을 금(金)이라 하자, 요(遼)나라에서 금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고려에 원병을 청했으나 따르지 않았습니다. 이는 나중에 후환을 불러오게 됩니다. 1117년 금나라에서 “형인 대여진금국황제(大女眞金國 皇帝)가 아우인 고려 국왕에게..

고려왕조실록 2021.07.31

고려왕조실록 55 - 예종 1

고려왕조실록 55 - 예종 1 * 여진정벌에 대한 맹세 1079년 2월 11일 부친 숙종과 명의태후 유씨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나 17세의 성년이 되어 고려 제16대 황제에 오른 예종(睿宗)은 이름은 우(俁), 자는 세민(世民)으로, 일찍부터 뜻이 깊고 침착해 도량이 넓었으며 학문을 좋아하였습니다. 그는 장성한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태자로 책봉되지 못하다가 1100년에야 왕태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태자 책봉이 그렇게 늦어진 것은 부친 숙종의 왕위 계승과정에서 조카로부터 왕위를 빼앗다시피 하였기에, 자신의 후속 타자를 넘보고 줄줄이 버티고 서있는 형제들을 외면하고 어린 아들에게 왕위를 넘겨주려고 하는 것이 무척 부담스러웠을 것입니다. 당시에 숙종의 뒤를 이을 만한 형제들 중에는 부친 문종과 인경현비 이씨 사..

고려왕조실록 2021.07.31

고려왕조실록 54 - 숙종 2

고려왕조실록 54 - 숙종 2 * 동요하는 고려사회 숙종은 자신은 왕위를 빼앗다시피 물려받았지만, 그의 동생 부여후 왕수가 세력을 키운다는 등, 다음 왕위에 오를 준비를 한다는 등의 소문이 무성하자 그를 역모죄로 잡아 들여 귀양을 보내버리고 왕수는 귀양지에서 객사하게 됩니다. 숙종 자신은 조카를 몰아내고 형의 왕위를 이어받았지만 다음 왕위는 자기의 큰아들 왕우에게 물려주고 싶어 했습니다. 사실 이 때까지도 고려에서는 형제상속이 오히려 더 자연스러웠던 듯합니다. 이 때 형제상속이 자연스럽게 보인 데에는 고려 전기의 왕들의 수명이 대체로 짧았다는 점 때문입니다. 40을 넘긴 왕들이 많치 않았으니까요. 그러다 보니 사후 자식의 나이가 제위를 잇기에 충분치 못한 경우가 많았던 것입니다. 그래도 선종이나 숙종, ..

고려왕조실록 2021.07.29

고려왕조실록 53 - 숙종 1

고려왕조실록 53 - 숙종 1 * 숙종, 조카의 왕위를 빼앗다. 고려의 제15대 왕 숙종(肅宗)은 1054년 7월28일에 부친 문종과 인예왕후(仁睿王后)사이에서 태어났는데, 어려서부터 총명했고, 자라서는 효성스럽고 근검했으며 성격이 굳세고 과단성이 있었습니다. 오경(五經)과 제자백가서 및 사서를 빠짐없이 두루 공부해 문종이 “장차 왕실을 부흥시킬 사람은 바로 너다.”라며 무척 아꼈다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선종이 죽으며 모든 종친과 만조백관이 그에게 갈 줄 알았던 왕위를 병석에 누운 11살짜리 자기 아들에게 물려준 것이었습니다. 숙부의 몸으로 병약하고 나이 어린 조카, 헌종의 왕위를 강탈했다고 하지만, 숙종은 사실 명분상으로는 그다지 꿇리지 않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고려시대에는 태조의 훈요 10조에 따..

고려왕조실록 2021.07.29

고려왕조실록 52 - 헌종

고려왕조실록 52 - 헌종 * 헌종의 등극 그리고 스스로 내준 왕위 덕종과 정종이 그러했고 선종이 그러했던 것처럼 왕의 소생이 없거나 어려서 국사를 관장할 능력이 없을 경우에는 그의 동생에게 왕위를 물려 주는 것이 전통처럼 굳어버린 시대였습니다. 선종이 재위 10년 7개월 만에 임종하자 조정의 대신들과 형제들과 왕의 형제들은 11세에 불과한 선종의 아들 욱 대신에 선종의 동생이자 문종의 셋째아들인 계림공 왕희가 대권을 이어 받을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선종은 자신의 11살 밖에 되지 않은 어린 아들 욱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실수를 범하고 맙니다. 명군으로 일컬어졌던 선종이 이런 결정을 한 이유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왕욱은 선종과 두 번째 비 사숙태후 사이에서 1084년 6월에 태어났는데, 그는 어려..

고려왕조실록 2021.07.28

고려왕조실록 51 선종 3

고려왕조실록 51 선종 3 * 고려 외교의 중심에 서다. 종교적인 입장에서만 보면 불교와 유교는 분명 적대적인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나라를 다스리는 선종의 입장에서 본 불교와 유교는 공히 부흥을 꾀하여야 할 대상들이었습니다. 불교는 민심을 안정시키고 모든 백성들의 심적 유대감을 유지해 나가는데 없어서는 안 될 대상이었습니다. 그런가하면 유교는 그때 이미 고려의 정치를 이끌어가는 기본 토대를 이루고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까닭에 선종은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유교와 불교가 균형을 이루며 발전하도록 배려를 하였습니다. 의천에 의해 불교가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동안 국학에 공자의 가르침을 가르치는 등 유교의 발전에도 많은 공을 들인 결과, 공자의 가르침을 언행의 기본으로 삼았던 고려..

고려왕조실록 2021.07.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