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189

<조선왕조실록(122)> 정조 3 - 척신 정치(2)

정조 3 - 척신 정치(2) 외척들인 홍봉한과 김씨가의 싸움은 양 쪽 모두의 입지 약화를 가져왔고, 이 와중에 정후겸이라는 새로운 척신이 부상하게 되었습니다. 영조가 무척 아꼈다는 화완옹주는 정우량의 아들 정치달에게 시집갔는데, 결혼 8년 만에 후사도 없이 남편이 죽고 말았습니다. 외로운 그녀가 일가 중 하나를 양자로 들이니 그가 바로 정후겸입니다. 영조는 옹주를 아끼듯이 정후겸 또한 몹시 아꼈고, 정후겸은 열일곱의 나이에 과거에 합격하여 스물에 승지에 오르며 승승장구하였습니다. 한편, 홍봉한 가문은 세손의 보호자를 자처하며 중앙정치에 영향력을 키우려 했으나, 정작 세손은 자라면서 홍봉한 등 외가 척신들에 대한 불신을 드러냈습니다. - 사위를 버리는데 같이 해 놓고 외손자를 지켜주겠다고? 세손이 홍봉한 ..

조선왕조실록 2021.05.12

<조선왕조실록(121)> 정조 2 - 척신 정치(1)

정조 2 - 척신 정치(1) 25세의 나이에 보위에 오른 정조에게 최우선 과제는 척신 척결이었습니다. 영조 정조 시대 당쟁의 중심에는 홍봉한 등 척신이 자리했고, 그 당쟁이 사도세자와 정조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보아야 하는데, 정조는 등극 후 그 문제를 말끔히 정리하고픈 것이었습니다. 척신 당쟁 정치의 흐름을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 영조 31년, 조정은 거의 완벽한 노론 천하가 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영조의 탕평책을 지지하는 이들이 조정을 장악했으니, 그 최고의 실력자가 사도세자의 장인 홍봉한이었습니다. 홍봉한의 위세는 사도세자 죽음 이후 더욱 커져(아들을 죽인 자와 사위를 죽은 자의 동지애?) 그 아우 홍인한과 아들 홍낙임 등도 덩달아 실세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홍봉한 ..

조선왕조실록 2021.05.12

<조선왕조실록(120)> 정조 1 - 정조 등극

정조 1 - 정조 등극 사도세자가 영조에 의해 죽음을 맞이하게 된 이유, 그 진실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길 없으나, 일단 지난 여러 회에서 살핀 바를 종합 해 다음과 같이 정리해 봅니다. - 영조와 세자의 출발은 여느 왕과 세자와 다름이 없었다. - 그러나 영조의 세자에 대한 기대가 지나치게 컸고, 그 기대는 다른 누구도 아닌 영조의 과도한 욕심으로 인해 실망으로 바뀌어 갔으며, 그 과정에서 세자는 정상궤도를 이탈하게 되었다. - 결국 세자에게 정신질환이 생겼고, 세자는 그로 인해 세자 직의 유지는 물론 더 나아가 임금이 될 수도 없는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 사직에 대한 부담과 절대권력에 대한 욕심이 매우 컸던 영조는 세자의 무너진 모습, 그리고 이에 대비되는 자질을 갖춘 세손의 등장에 갈등했고, ..

조선왕조실록 2021.05.09

<조선왕조실록(119)>경종 영조16 - 사도세자(9)

경종 영조16 - 사도세자(9) 사도세자는 자신의 친자식을 낳은 후궁도 죽였고 점치는 맹인도 죽였습니다. 여러 기록에 의해 객관성을 어느 정도 확보한 것만 보더라도 사도세자가 죽인 사람의 수는 오늘날 어지간한 연쇄살인범이 죽인 숫자보다 더 많습니다. 정조가 읽고는 제목을 “천유록”에서 “대천록”으로 직접 고쳐주었다는 책 속에 사도세자가 죽인 사람의 숫자가 나옵니다. - 세자가 죽인 중관, 내인, 노속이 거의 백여 명에 이르고 낙형 등이 참혹하다.(世子戕殺中官內人奴屬將至百餘 而烙刑等慘) 사도세자가 많은 사람을 죽인 희대의 살인자라는 점은 영조가 세자를 폐하며 발표한 폐세자반교문의 첫머리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또한,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간 나경언의 고변이 있던 그날 밤 영조가 뜰에 엎드린 세자에게 소리..

조선왕조실록 2021.05.09

<조선왕조실록(118)> 경종 영조 15 - 사도세자(8)

경종 영조 15 - 사도세자(8) 사도세자가 노론과 소론 간 당쟁의 희생양이라는 주장에는 공감하기 어렵습니다. 노론 가문 출신인 정순왕후가 세자의 죽음에 큰 역할을 했다는 주장은, 그 녀가 대궐에 들어왔을 때 고작 열다섯 살의 나이인데다 이때는 영조 35년으로 이미 왕과 세자 간의 관계가 충분히 악화된 때라는 점에서 수긍하기 어렵습니다. 사도세자가 소론에 기운 태도를 보였다는 해석 역시 지나칩니다. 세자의 대리청정의 영역은 극히 제한적 이었고, 영조의 눈치를 보느라 대부분의 일을 “대조께서 결정하신 일이오”라는 식으로 처리했다는 기록이 많은데다, 세자가 영조나 노론의 뜻에 반해(즉, 소론을 위해)한 결정적이거나 그럴듯한 일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더욱이 사도세자가 대리청정을 할 때에는 영조가 노론의 득세..

조선왕조실록 2021.05.08

<조선왕조실록(117)> 경종 영조 14 - 사도세자(7)

경종 영조 14 - 사도세자(7) 자진하라는 영조의 서슬 퍼런 명에 세자는 울며 애원했으나 영조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어쩔 도리가 없음을 깨달은 세자가 자결하려 하자 춘방의 신하들이 이를 막았고, 결국 왕은 뒤주를 내오게 하고 그 속에 세자를 가두었습니다. 다만, 실록에는 뒤주라는 말은 나오지 않고 “안에다 엄중히 가두었다(自內嚴囚)”라고만 되어 있는데, 이런 점에서 뒤주에 8일을 가두어 죽였다는 것은 사실이 아닐 것이라는 주장도 상당히 있습니다. 어쨌든 지금까지의 통론은 세자가 뒤주에서 8일을 보낸 후 죽었다는 것입니다. 세자가 죽을 때까지 별 반응을 보이지 않던 영조는 다음과 같은 명을 내렸습니다. - 어찌 30년 부자의 정을 생각하지 않겠는가. 호를 회복하고 시호를 사도세자라 하겠노라..

조선왕조실록 2021.05.08

<조선왕조실록(116)> 경종 영조 13 - 사도세자(6)

경종 영조 13 - 사도세자(6) 나경언의 고변이 있은 날부터 세자는 연일 엎드려 대죄하였으나 영조는 답이 없었고, 보름이 넘자 극도의 불안에 휩싸였습니다. - 아무래도 나를 살려두지 않을 모양이다. 세자는 “내 기어이 없애버리겠다”라며 칼을 뽑아 휘두르기도 하였고(누구를?), 그날 밤 여러 괴상한 비어가 삽시간에 궐 안에 퍼졌습니다. 영조의 분노와 고민은 깊어졌습니다. 며칠 뒤 영조는 건명문에서 밤을 지새우면서 새벽에 영의정과 우의정을 입궐케 했습니다. 신하들은 “요즘 세자께서 매우 뉘우치고 있다”고 해명했지만 영조는 “말하지 마라, 말하지 마라. 여망(남은 희망)이 전혀 없다”면서 개탄했습니다 또한 영조는 신하들에게 강한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습니다. - 나경언이 어찌 역적이겠는가? 지금 조정 신하들의..

조선왕조실록 2021.05.08

<조선왕조실록(115)> 경종 영조 12 - 사도세자(5)

경종 영조 12 - 사도세자(5) 세자와 영조의 관계가 돌이킬 수 없는 단계까지 와 있음을 보여 주는 사건이 영조 37년(1761) 세자의 관서(關西)행입니다. 세자는 그 해 4월 2일부터 22일까지 관서(평안도) 지방을 여행하고 돌아왔습니다. 그 직후인 5월 초, 서지수, 서명응이 세자를 면대해 아뢰었습니다. - 저하께서 비록 궐 안에 계시더라도 일종 일정을 중외에서 모르는 경우가 없사온데 하물며 여러 날 동안 길을 떠난 경우이겠나이까. - 천리에 갔다가 오신 몸이면서도 아직도 지척의 진현(임금을 뵈알함)은 행하지 못하셨고,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말을 타고 달리는 예후이신데 아직도 아프다고 하신다면 사람들이 저하의 뉘우침을 의심할 것입니다. - 관서행을 종용한 자, 관서행 뒤에 세자를 대신해 임금의 명에..

조선왕조실록 2021.05.08

<조선왕조실록(114)> 경종 영조 11 - 사도세자(4)

경종 영조 11 - 사도세자(4) 대리청정 이후 영조가 세자를 질책하는 일은 매우 잦았고 그 내용도 혹독하고 모질었으며, 세자가 관(冠)을 벗고 뜰에 내려가 석고대죄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땅에 짓찧는 일이 다반사였습니다. 가장 극적인 것은 영조가 세자의 반성문을 받아보고 세자를 불러 몇 가지를 물어본 후 상복을 입고 걸어서 숭화문 밖까지 나와 맨땅에 엎드려 곡을 한 일이었습니다. 당연히 세자도 상복을 입고 뒤에 엎드려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신하들이 엎드려 울면서 “전하께서 어찌 이런 거조를 하십니까?”고 묻자 영조는 “무엇을 뉘우치느냐 물었는데, 동궁은 후회한다고만 말하면서 그 내용은 말하지 않았다. 이것은 남의 이목을 가리는 데 불과하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어 영조가 다시 선위 전교를 내리자 홍봉한은..

조선왕조실록 2021.05.08

<조선왕조실록(113)> 경종 영조 10 - 사도세자(3)

경종 영조 10 - 사도세자(3) 영조와 세자의 사이는 세자가 대리청정으로 정무에 직접 관여하면서 더욱 멀어졌습니다. 전근대 왕정에서 대리청정은 기회이자 위기였습니다. 국왕을 대신해 정무를 잘 처리할 경우는 능력을 인정받고 입지를 다질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하면 신뢰를 잃고 도태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영조는 신하들의 형식적 반대 의례를 거친 후 재위 25년에 대리청정을 시작했습니다. 영조는 정무와 거리가 있는 세자의 기질을 사전의 훈련으로 조정하려는 의도였을 것입니다. 영조는 대리청정을 하면서 세자에게 기본적인 지침을 하달했습니다. - 여러 신하들이 일을 아뢴다고 하여 ‘그렇게 하라(依爲之)’고 하면 반드시 잘못을 저지를 우려가 있다. 의심스러운 점이 있으면 반드시 대신에게 묻고 자신의 의견을 참작한..

조선왕조실록 2021.05.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