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189

<조선왕조실록(132)> 순조 3 - 홍경래의 난

순조 3 - 홍경래의 난 1811년 12월 한양에서 멀리 떨어진 평안도 가산에서 일군의 무리들에 의해 저항의 기치가 올려졌습니다. 그 중심에 평서대원수라 불리던 나이 마흔의 홍경래가 있었습니다. 홍경래는 일찍이 평양 향시에 합격한 뒤 한양으로 올라와 대과에 응시했다가 낙방했습니다. - 내 그럴줄 알았다. 합격자는 죄다 한양 권세가의 자제들. 썩어빠진 세상이다. 홍경래는 각지를 돌아다니며 벗을 사귀고 뜻 맞는 이를 구했는데, 제일 먼저 가산 땅에서 서자 출신의 인텔리인 우군칙과 의기투합했습니다. 이어 대부호인 이희저를 끌어들이고, 인근의 부자, 지식인 장사들을 규합해 무기를 마련하고 가산의 다복동에 지휘부를 차려 은밀히 준비하더니, 이윽고 일어났습니다. - 3년째 흉작인데다 역병까지 겹쳐 유랑자가 산천에 ..

조선왕조실록 2021.05.17

<조선왕조실록(131)> 순조 2 - 정순왕후의 정치

순조 2 - 정순왕후의 정치 순조가 어린 관계로 수렴청정을 하게 된 정순왕후, 정순왕후는 사도세자의 죽음에 찬동하였던 벽파의 실세 김귀주의 누이로, 정권을 잡은 후 좌의정 심환지를 영의정으로 삼고 친정 6촌 오빠인 김관주를 이조참판직에 앉히는 등 벽파들을 대거 등용했습니다. 또한 함께 권력을 잡은 심환지 등은 정조의 탕평을 보좌하였던 인물들을 대거 죽이거나 쫓아내고 노론 벽파 정권을 수립하였습니다. 정순왕후는 정조가 설치했던 장용영을 혁파하고, 규장각의 기능을 축소하는 한편, 정조도 사대부의 반발을 우려해 하지 못했던 내노비와 시노비, 즉 각 궁방, 종묘, 종친, 의정부 등에 소속된 6만 6천여 명의 노비들을 선왕 정조의 뜻이라며 해방시키는 큰일을 성사시키기도 하였습니다. 종종 정순왕후는 다음과 같이 묘..

조선왕조실록 2021.05.17

<조선왕조실록(130)> 순조 1 - 천주교 박해

순조 1 - 천주교 박해 순조가 등극했으나 나이가 어린 관계로 궁궐의 어른인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정순왕후는 왕의 즉위를 공포하는 글에서 '척사'를 표방했는데, 이는 천주교에 대한 탄압을 예고하는 것이었습니다. - 지금 듣건대 사학{邪學, 천주교, 서학(西學)이라고도 함} 이 불길처럼 번지고 있다. - 수령들은 오가작통법을 닦아 밝혀 사학을 하는 자를 진멸함으로써 남는 무리가 없도록 하라. 정순왕후의 말대로 이즈음 천주교는 더욱 확산되고 있었는데, 중국인 신부 주문모가 들어오는 등 교세는 더욱 팽창되어 전국에 신도가 1만을 헤아렸습니다. 정조 시절에는 노론 벽파가 여러 차례 천주교를 엄히 다스릴 것을 요구했으나, 정조는 한결같았습니다. - 정학이 바로 서면 서학은 힘을 못 ..

조선왕조실록 2021.05.17

<조선왕조실록(129)> 정조 10 - 정조암살설

정조 10 - 정조암살설 조선 왕들의 죽음 가운데 그 죽음에 의문과 의혹이 이는 경우는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독살설은 당대에 왕의 죽음을 아쉬워하거나 백성들의 공분을 사는 신료에 대한 원망에서 나오거나 아예 현대의 일부 사람들이 왜곡하고 지어낸 것이 대부분으로, 소현세자나 고종을 제외하면 간단한 정황 증거조차 찾을 수 없는(오히려 독설로 볼 수 없는 증거가 많은) 음모론에 불과한 것으로 보입니다. 정조의 경우도 현대에 들어, 그 죽음에 대한 몇 가지 석연찮은 점을 들면서 노론 벽파의 거두 심환지와 정순왕후의 주도로 암살되었다는 주장이 많이 제기됩니다.(소설, 드라마, 영화에서는 암살설을 기정사실화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극적 재미를 위한 것으로 가려 이해해야 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나 정조 ..

조선왕조실록 2021.05.17

<조선왕조실록(128)> 정조 9- 정조의 한계, 시대의 한계(2)

정조 9- 정조의 한계, 시대의 한계(2) 조선 후기, 특히 영조, 정조 시대 백성의 가장 큰 고통은 ‘환곡’이었습니다. 환곡은 본래 관서에서 춘궁기에 백성들에게 곡식을 빌려주었다가 1할을 더 거둬들이는 것이었는데 이때에 이르러서는 2-3할을 더 걷어 들이는 것이 상례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환곡이 지방 수령, 변장들에게 엄청난 이익을 갖다 주는 사업이 된 것입니다. 어느 새 환곡은 백성이 의무적으로 빌려야 하는 강제세금으로 변질되었고, 그나마도 빌려줄 때는 쭉정이로, 받아들일 때는 실곡으로 받는 일이 허다해서 오히려 선이자를 공제하고 빌려주는 일이 선호되기까지 하였습니다. 정조는 이러한 환곡의 폐해를 해결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고(해결은 하지 못했지만), 금난전권을 폐지(신해통공)하여 상권을 활성화 시..

조선왕조실록 2021.05.13

<조선왕조실록(127)> 정조 8- 정조의 한계, 시대의 한계(1)

정조 8- 정조의 한계, 시대의 한계(1) 근래 정조는 소설, 사극 등에서 자주 주인공으로 등장하면서 이런 인상이 깊이 심어졌습니다. - 비운의 개혁군주 - 정순왕후와 벽파에게 고난당하다 끝내 독살당하고 말았구나. - 독살당하지 않고 더 오래 살았다면 조선의 운명도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위와 같은 얘기는 잘못된 것입니다. 우선 정순왕후나 벽파가 정조의 사도세자 추승과 탕평정책 등에 반대한 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지만, 정조는 이들을 사생을 걸고 싸울 정적으로 여긴 것이 아니라 설득해서 끌고 갈 정치 파트너로 생각했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진즉에 제압을 해버렸을 것이고, 실제로 제압할 능력과 힘이 정조에게 있었습니다. 벽파의 정책 반대는 어디까지나 정조가 허용한 범위 내에서의 반대에 불과했던..

조선왕조실록 2021.05.13

<조선왕조실록(126)> 정조 7- 정조의 분신 홍국영(2)

정조 7- 정조의 분신 홍국영(2) 정조의 훌륭한 동지 홍국영은 홍인한, 정후겸 등을 사도세자에 대해 불경했으며 정조의 즉위를 방해했다는 죄를 물어 숙청했고, 정조의 외척 홍봉한 집안도 정치적으로 재기하기 어려운 지경으로 몰아 제거했으며, 정순황후의 친동생 김귀주도 유배시키고 그 세력을 무너뜨리면서 권력의 정점에 섰습니다. 홍국영은 외척 세력을 배격하고 왕권을 강화하려는 정조의 뜻을 충실히 실행했으나, 결국 자신이 스스로 외척이 되면서 위기를 자초하게 되었습니다. 정조는 혼인한 지 16년이 되도록 후사를 얻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에 대비가 후사가 급하다는 이유로 빈을 간택하도록 하였습니다. 홍국영은 자신의 누이를 빈으로 밀었고 결국 간택되었으니 이가 바로 ‘원빈’입니다. 원빈이 아들만 낳는다면 홍국영의 ..

조선왕조실록 2021.05.12

<조선왕조실록(125)> 정조 6- 정조의 분신 홍국영(1)

정조 6- 정조의 분신 홍국영(1) 정조는 해마다 12월 3일이 되면 즉위를 가능하게 한 일등공신들을 불러 위로 모임을 가졌는데 이름하여 동덕회입니다. 주요 멤버는 영조 시대에 정조를 위해 총대를 메고 상소를 올렸던 서명선, 정조의 사부 김종수 등이었지만, 최고 중의 최고는 홍국영이었습니다. 조선의 영조, 정조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수많은 사극에서 짧지만 크게 활약한 인물로 늘 등장하는 인물, 그가 바로 홍국영입니다. 정조에게 홍국영은 마음이 통하는 벗이자 최고의 참모였고 믿음직한 경호실장이었습니다. 홍국영은 어려서부터 용모가 준수하고 눈치가 빠르며 수완이 좋아 임기응변에 능했고, 글재주도 매우 뛰어났습니다. 성격이 호방하여 술과 친구들을 좋아했고, 장기와 같은 잡기와 시조, 창에도 능했기 때문에 집안 ..

조선왕조실록 2021.05.12

<조선왕조실록(124)> 정조 5 - 정조 암살 기도 사건

정조 5 - 정조 암살 기도 사건 영화 ‘역린’의 소재가 되었던 정조 암살 사건 비슷한 일이 있기는 있었던 듯합니다. 그러나 뭔가 어설프기 짝이 없습니다. 정말 궁궐에서 이런 식의 일이 있었다고 볼 수 있을지 의심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실록에 나와 있는 내용을 먼저 보면 이렇습니다. - 1777년(정조 1년) 7월 28일, 대궐 안에 도둑이 들었다. - 임금께서는 언제나처럼 조정 일이 끝난 뒤 존현각에 나아가 촛불을 켜고서 책을 펼쳐 놓고 읽으셨는데, 곁에 내시 한 사람이 있었으나, 숙직하는 군사들을 살펴보러 가 좌우가 텅 비어 아무도 없었다. - 이때 갑자기 행랑채 위를 따라 은밀하게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 임금이 한참 동안 고요히 들어보며 도둑이 무얼 하려는지 살피시더니, 친히 환관과 ..

조선왕조실록 2021.05.12

<조선왕조실록(123)> 정조 4 - 정조시대 개막

정조 4 - 정조시대 개막 보위에 오른 정조가 최우선 과제로 삼은 것은 전회에서 본 것과 같은 척신들을 제거하는 것이었습니다. 정조가 세손 시절의 경험과 공부를 통해 깨달은 것은 과도하게 발호하는 척신을 뿌리 뽑지 않고서는 제대로 된 정치는 물론 임금의 자리도 위태해 질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대사헌 이계가 시동을 걸어주었습니다. - 국정을 농단하고 전일에 전하의 대리청정을 반대한 정후겸을 역률로 다스리시고, 화완옹주를 내치소서. 정조는 이를 간압해 그대로 집행토록 했습니다. 그러나 신하들의 요구는 그게 다였습니다. 이에 정조는 분노했습니다. -하찮은 정후겸에 대해서는 죄를 청하면서 기세가 하늘에 닿아 있는 자에 대해서는 머뭇거리고 두려워하니, 이런 대간들을 어디에 쓰겠느냐? 그제서야 몇 건의 홍인한 ..

조선왕조실록 2021.05.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