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189

<조선왕조실록(102)> 숙종 8 - 장희빈(5)

숙종 8 - 장희빈(5)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집권했으나 집권세력다운 면모를 보일 수가 없었습니다. 두 번의 환국을 통해 언제든지 또 다른 환국이 있을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남인은 새로운 실력자로 떠오른 중전의 오라비 장희재와 유대를 돈독히 하고 임금의 뜻에 순종하는 등 복지부동하였습니다. 그런데 기사환국이 있은지 4년이 흐른 숙종 19년, 남인을 긴장시키는 일이 있었으니, 숙종이 새로이 궁인 최씨를 숙원으로 삼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실록에는 별 기록이 없으나, 야사에는 언제나 폐비에게 의리를 다하는 모습이 숙종의 눈에 띄었다는 것입니다. 숙종은 이즈음부터 숙원 최씨를 총애하기 시작했고, 중전인 장희빈의 경계심이 커졌으며, 남인의 긴장감도 고조되기 시작했습니다.(언제 환국이 있을지 모른다!..

조선왕조실록 2021.05.04

<조선왕조실록(101)> 숙종 7 - 장희빈(4)

숙종 7 - 장희빈(4) 숙종이 폐비의 뜻을 거두려하지 않자 86명의 대신, 대간이 폐비 반대 상소를 올렸습니다. 대노한 숙종은 이들의 상소가 모반 대역보다 더 하다면서 국청을 설치하고 친국을 시작하였습니다. 숙종은 이들이 임금을 배반하고 부인을 위해 절의를 세우려한다며 고문을 가하였고, 박태보 등이 모진 고문에도 의연히 대처하자 이들에게 압슬을 가하는 등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의 고통을 주었습니다. 결국 박태보, 오두인이 대표로 고문을 받고 모두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숙종의 이러한 행위는 미치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것이겠지만, 사실은 모두 숙종의 의도된 과잉 행위였습니다.(“이래도 반대할래?”) 더 이상 반대가 없자 드디어 숙종은 1689년(숙종 15년) 인현왕후를 폐서인하여 친정으로 쫒아내고 장희..

조선왕조실록 2021.05.04

<조선왕조실록(100)> 숙종 6 - 장희빈(3)

숙종 6 - 장희빈(3) 원자 책봉이 강행되자 팔순의 나이에도 파이터 기질이 여전한 서인의 영수 송시열이 원자 책봉은 아직 이르다며 정면으로 반대하는 소를 올렸습니다. 그동안의 방식대로 이번에도 숙종의 대응은 성급하다는 느낌을 줄 정도로 신속하고 단호했습니다. 숙종은 이미 명호가 정해졌는데도 이를 재론하는 것은 다른 뜻이 있어서일 것이라며 송시열을 삭탈관직하고 문외출송할 것을 명했습니다. 이어서 송시열의 토벌을 청하지 않았다하여 도승지 이하 네 승지와 대간들을 파직한 후 삼정승에 권대운, 목래선, 김덕원을 임명한 것을 시작으로 조정을 남인으로 완전히 물갈이를 해버렸습니다. 그리고 새로 임명된 대간들의 청을 받아 송시열을 제주에 안치한 후 대부분의 서인을 파직하고 유배보냈습니다. 이와 같이 기사년에 느닷없..

조선왕조실록 2021.05.04

<조선왕조실록(99)> 숙종 5 - 장희빈(2)

숙종 5 - 장희빈(2) 인현왕후의 청으로 다시 궁궐로 돌아온 장희빈에 대한 숙종의 총애는 매우 컸습니다. 숙종은 장희빈을 숙원(종4품)을 거쳐 소의(정2품)로 승급시켜 주었고, 장희빈은 이러한 숙종의 총애를 등에 업고 왕실의 큰 어른 자의대비의 환심을 사는 한편, 오빠 장희재와 그의 첩 숙정을 통해 밀려나 있는 남인과 연대를 구축했습니다. 이에 집권 서인은 긴장했고, 부교리 이징명과 김만중이 나서 장희빈을 견제하는 소를 올렸지만, 숙종은 오히려 이들을 유배형에 처했습니다. 그만큼 장희빈이 숙종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입니다. 이와 같이 장희빈의 권세가 높아지자 현숙한 여인 인현왕후로서도 언제까지나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습니다. 인현왕후는 숙종에게 은근히 장희빈을 경계하는 말을 하기도 했고, 숙종의 총애를..

조선왕조실록 2021.05.04

<조선왕조실록(98)> 숙종 4 - 숙종의 여인 장희빈

숙종 4 - 숙종의 여인 장희빈 숙종 6년에 왕비 인경황후가 세상을 뜨고, 그 이듬해에 새로 왕비를 들이니 이 사람이 노론 핵심인사인 민유중의 딸 인현황후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인현황후가 들어오기 전에 이미 왕의 마음을 사로잡은 여인이 있었으니, 이 사람이 뒤에 장희빈으로 불리게 된 여인 장씨입니다. 장희빈(글의 진행상 아직 희빈이 아니나 역사의 결과물이므로 편의상 장희빈이라 함)은 1659년 장경의 둘째 딸로 태어났습니다. 널리 알려진 대로 그 오빠이자 맏아들은 장희재입니다. 장희빈의 가계에서 주목할 만한 사실은 숙부가 역관 장현이었다는 것입니다. 당시 역관은 중인이었지만 상당한 부를 축적했고, 그것을 매개로 권력도 어느 정도 누릴 수 있었는데, 장현은 남인들과 매우 친밀한 사이였습니다. 장희빈의 ..

조선왕조실록 2021.05.04

<조선왕조실록(97)> 숙종 3- 서인의 복귀와 노론,소론 분열

숙종 3 - 서인의 복귀와 노론,소론 분열 전회에서 본 경신환국의 연출자는 김석주이지만, 결국 남인이 떠난 자리를 채운 건 서인이었습니다. 서인은 곧바로 잃어버린 6년의 복구에 나서, 먼저 서인의 영수 송시열을 복권시켰습니다. 임금도, 대비도 높이 받들고, 영상 이하 대신들도 모두 다 제자들이니, 송시열은 예전의 그 권위를 모두 되찾았다 할 만 했습니다. 송시열의 유배생활은 사형수의 하루하루나 다를 것이 없었습니다. 남인들은 틈만 나면 자신의 목숨을 원했고, 결단이 빠른 왕이 언제 ‘아뢴 대로 하시오’라고 할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남인 정권을 몰아낸 김석주는 구원자나 다름이 없었고, 이런 이유로 송시열은 여러 방면에서 김석주와 뜻을 같이 했습니다. 최강 권력자의 꿈을 이룬 김석주는 남인의 복귀 가..

조선왕조실록 2021.05.04

<조선왕조실록(96)> 숙종 2 - 경신환국(庚申換局)(2)

숙종 2 - 경신환국(庚申換局)(2) 1680년(숙종 6년) 2월, 남인의 리더 영의정 허적은 조부의 시호를 받은 것을 축하해 대신들을 불러 축하잔치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이날은 비가 많이 내렸는데, 숙종은 허적을 위해 왕의 잔치 때 쓰는 유악(기름 먹인 장막)과 차일을 영상에게 갖다 주라는 지시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허적은 이미 유악과 차일을 갖다 쓰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이를 안 숙종은 "과인의 허락도 없이 임금의 물건을 가져갔단 말이냐. 한명회도 못한 짓을 하다니 용서할 수 없다"라며 대노했습니다. 숙종은 그날로 남인이 맡고 있던 훈련대장, 총융사 등의 병권에 관한 요직을 서인측 인사로 물갈이해버렸고, 승지와 대간마저 대거 서인으로 교체했습니다. 이어서 남인인 좌의정, 우의정, 대사헌이 사직 소를 ..

조선왕조실록 2021.05.04

<조선왕조실록(95)> 숙종 1 - 경신환국(庚申換局)(1)

숙종 1 - 경신환국(庚申換局)(1) 서인과 남인이 치열하게 대립하던 숙종대 초반의 정국에서 정국을 이끌어간 인물은 공작정치의 달인 김석주입니다. 서인의 대표적 명문가 출신에 현종, 숙종의 가까운 외척이기도 한 김석주는 송시열을 스승으로 모신 서인 출신이었으나, 송시열이 김석주의 조부인 김육(대동법 추진)과 반목하는 바람에 송시열과 관계가 좋지 않아졌습니다. 김석주는 한직에 머무르다 현종 말년의 2차 예송 논쟁에서 서인임에도 자신의 스승인 서인의 거두 송시열을 강하게 비판하였고, 결국 숙종이 즉위하면서 남인 정권이 권력을 잡는데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14세의 소년 임금 숙종은 즉위 후 곧 과거 예송 논쟁에서 송시열이 했던 주장은 잘못된 것임을 분명히 하면서, 기다렸다는 듯이 송시열 등 서인들을 줄줄이 ..

조선왕조실록 2021.05.04

<조선왕조실록(94)> 효종 현종 5 - 환국의 시대 돌입

효종 현종 5 - 환국의 시대 돌입 전회에서 본 예송논쟁은 단순히 복상 문제를 둘러싼 당파의 대립이 아니라, 왕권을 어떻게 위치 지을 것인가에 대한 정치적 입장의 근본적인 차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즉 효종이 둘째 아들이라서 장자의 예를 따를 수 없다는 서인의 견해는 왕권도 일반사대부와 동등하게 취급하려는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신권(臣權)의 강화를 꾀하려는 입장이었고, 반면 비록 효종이 둘째 아들이지만 왕은 장자의 예를 따라야 한다는 남인의 견해는 왕권을 일반사대부의 예와 달리 취급하려는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왕권강화를 통해 신권의 약화를 꾀하려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러나 현재의 기준으로는 상복을 몇 년 입는 것을 가지고 온 나라가 몇 해 동안 죽고 살기로 논쟁을 벌이고, 이 문제로 귀양에 사람이 죽기..

조선왕조실록 2021.05.04

<조선왕조실록(93)> 효종 현종 4 - 예송논쟁

효종 현종 4 - 예송논쟁 북벌을 기치로 한 나름대로의 개혁군주 효종은 자신의 꿈을 제대로 펼쳐보지도 못한 채 1659년 5월 4일, 재위 10년 만에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습니다.(향년 41세) 효종은 귀 밑에 종기가 심각해 침의 신가귀로부터 침을 맞고 고름을 조금 짜낸 후 이것이 화근이 되어 몇 말이나 되는 엄청난 양의 피를 쏟고 곧 그 충격으로 사망했다고 합니다. 한마디 유언을 남길 겨를도 없는 순식간의 일이었고(타살설이 있으나 근거나 배경이 취약합니다), 침을 놓은 신가귀는 교살형을 당하였습니다. ---------------- 효종이 죽은 후 선양에서 태어난 아들이 18세의 나이에 왕위를 이으니, 이가 조선 제18대 왕인 현종입니다. 현종 시대를 특징지을 수 있는 키워드 둘은 예송논쟁과 전례가 없..

조선왕조실록 2021.05.04